현존하는 이만익의 작품 중 제작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추정됨)은 1953년(15세 무렵)에 그린 소묘들이다.
당시 작가는 경기중학교 미술반에서 박상옥(朴商玉, 1915-1968)의 지도를 받으며
주로 주변 풍경을 그렸다고 회고하였는데,
그중엔 전장에서 총을 든 병사나 전투기, 전차 사고 현장 등을 그린 이 소묘들은
전쟁 중 혼란스러웠던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이만익이 어린 나이부터 일찍 혼란스러운 현실에서부터 작품의 소재를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던 어린 시절에 맞닥뜨린 분단과 전쟁은 더 쓰라리게 다가왔을 것이다.
한편 이 해 이만익은 그동안 중단되었던 국전(國展)이 재개되자
< 골목 >과 < 정동의 가을 >을 출품하여 입선을 따내기도 했는데,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 입선에 오른 게 논란이 되어
이듬해부터 국전 출품에 나이 제한이 생기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아쉽게도 국전의 도록이 당시엔 발간되지 않아 해당 출품작의 면모를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제목으로 추정하되 아마도 서울 풍경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후술하겠지만
청년 시절 이만익의 작품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게 서울 풍경화라는 걸 생각하면
이때의 입선작은 훗날 전개될 작업의 주제를 예견하는 듯하다.
이후 195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한 이만익은
1961년 졸업할 때까지 장발(張勃, 1901-2001), 장욱진(張旭鎭, 1917-1990),
권옥연(權玉淵, 1923-2011), 문학진(文學晉, 1924-2019), 김종영(金鍾瑛, 1915-1982) 등의 가르침을 받았고,
밤에는 화가 이봉상(李鳳商, 1916-1970)이 안국동에서 운영하던 화실도 드나들며 누드모델 수업에 몰두했다.
당시 여성 모델을 그린 작품 대다수는 거친 붓질 위주로 과격한 표현 효과를 앞세운 것들이며,
마침 이러한 인물 표현은 이봉상이 선호한 화풍이기도 해서
당시 이만익이 스승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봉상이 인물화에서 자연광의 명랑함을 부각하고자 밝고 선명한 색채를 선호한 것과는
달리 이만익의 인물화는 고동색이나 검은색 등 주로 어두운 빛깔을 사용하여 우울한 분위기가 짙다.
마치 전쟁 직후의 암담한 현실에 찌든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표현기법과 연출은
곧 서울을 배경으로 한 군상(群像) 작업으로 확대되었다.
1958년의 < 대합실 >, 1961년의 < 귀로(나그네) >, 1962년의 < 서울역 > 등은
당시 서울 이곳저곳을 드나들며 그린 여러 스케치를 토대로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색채가 지배하는 화면 속에서
어렴풋이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그러진 몰골에 표정은 뭉개진 참혹한 몰골이다.
게다가 그들은 삶의 무게에 탈진한 것인지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들은 작가의 술회처럼 “지친 군중의 모습6” 그 자체를 상징하는 셈이다.
특히 거친 붓질로 세부묘사를 생략한 채 강렬하게 인물을 포착한 기법은
현장에서 빠른 속도로 포착한 여러 소묘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즉, 여기서 작가는 거친 붓질로 암울한 사회현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장감을 앞세운 것이다.
그렇게 이만익은 3년간의 군대 시절에 잠시 활동을 중단한 걸 제외하면
꾸준히 작업에 몰두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64년 국전 출품을 재개할 무렵부터 이만익의 화풍은 점차 변모한다.
제13회 국전에 입선한 < 청계천 >은 재대 직후
본격적인 활동 재개를 알림과 동시에 화풍의 변화를 알려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러 장의 습작을 거친 뒤 직접 청계천으로 캔버스를 직접 가져와서
그린 끝에 완성한 이 대작은 < 대합실 >, < 서울역 > 등과 달리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나
판잣집들이 몰린 청계천 풍경을 현장에서 최대한 꼼꼼히 그린 정성이 돋보인다.
과격한 붓질은 이제 자제되어 극적인 인상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죽음의 스틱스강 물빛”이라는 작가 자신의 비유처럼
이 작품은 폐수로 새까맣게 오염된 청계천의 물빛과
아슬아슬하게 얹힌 강변의 판잣집들의 선명한 색채 대비로
암울했던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좀 더 상세히 분석하자면 이전까지의 작품들처럼
사회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으나,
격렬한 절망을 표출하기보다는 덤덤한 응시를 추구했다고 할까.
< 평론 안태연 >
[출처]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 - 청계천 - 이만익|작성자 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