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화가 이만익을 만나다


한국적 서양화 거장
 

​ 이 만 익  인 터 뷰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또 보통 시각 기능을 가진 사람이면 
알아볼 수 있는 형상으로 그려서 정감의 교류가 이뤄진다면 
일단 보는 사람도 그리는 사람도 서로 쉽지 않겠습니까?"

"예술가는 일단 이것이 자기의 일이고 
생명을 바쳐서 살아 있는 동안 해야 될 일인 만큼 
가장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부지런하게 
그렇게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뿌리와 정서를 화폭에…화가 이만익의 예술세계  [주말&문화] [9시 뉴스] / KBS 2023.01.14.
이만익 재조명전 2022 소마미술관 - [ 별을 그리는 마음 -  K B S 인 터 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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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_#별을그리는마음  #이만익다큐영상 #이만익인터뷰 #오원배인터뷰 #박서보인터뷰 #이건수인터뷰

■출처 : KBS 뉴스 
KBS 뉴스 김석입니다.촬영기자:김보현/영상편집:이현모/자막제작:김은영/내레이션:이상협    #이만익_#별을그리는마음  #이만익다큐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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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한국인의 뿌리와 정서를 가장 한국적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 
이만익 화백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화가의 정감 어린 작품들, 함께 감상해 보시죠.김석 기자가 안내합니다.

[리포트]["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시인이 별을 노래했듯 화가는 밤하늘 가득 별을 그렸습니다.
존경해마지 않았던 선배 화가 이중섭에게 바친 그림.
원근법과 명암법에서 벗어나 굵은 윤곽선과 선명한 색으로 단순화한 세계.
쓸 데 없이 어렵기만 한 그림을 화가는 거부했습니다.

​​[이만익/화가/1994년 : ]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또 보통 시각 기능을 가진 사람이면 
알아볼 수 있는 형상으로 그려서 정감의 교류가 이뤄진다면 
일단 보는 사람도 그리는 사람도 서로 쉽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그릴 것인가 번민했던 시절.청년 
이만익이 매달린 건 가난에 찌든 고단한 삶의 현장.
하지만 서른여섯 나이에 다녀온 프랑스 유학 이후 모든 것이 바뀝니다.
한국인의 뿌리와 정서, 희로애락으로 눈을 돌린 겁니다.
주몽 신화부터 판소리계 소설까지...
우리 고유의 이야기들이 화폭에 녹아들었습니다.

[이만익/화가/1984년 : 
"예술가는 일단 이것이 자기의 일이고 
생명을 바쳐서 살아 있는 동안 해야 될 일인 만큼 가장 성실하고, 
양심적으로, 부지런하게 그렇게 일을 해야 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개회식과 폐회식 미술감독을 맡아 
한국적인 색채와 미감을 전 세계인에게 선보였고,
 1997년엔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의 포스터를 그려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작고 10주기를 맞아 화가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최재혁/전시 기획자 : 
"어떤 분들은 되게 평면적이고 직설적이다 라는 오해를 많이 하시기도 하세요. 
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와 그 정신을 들여다 보면 
굉장히 깊은 철학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초창기 드로잉부터, 젊은 날의 모색기를 거쳐, 
가장 한국적인 이야기를 그리기까지 화가가 걸은 예술적 여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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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KBS 뉴스 
KBS 뉴스 김석입니다.촬영기자:김보현/영상편집:이현모/자막제작:김은영/내레이션:이상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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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서양화 거장 이 만 익 

He was the first middle student to qualify..
중학교 때 국선 입선 . "출품자격 논란 일으켜....

그림에 미쳐 버려라 ! 겁먹은 사내여
    미쳐라!  그리고 용기를 내라

이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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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자화상 스케치 1957

경기중학교 3학년 때인 1953년 
제 2회 국전에 < 정동의 가을 >과 (골목)을 출품해 입선했다.
중학생 신분으로 국전에 입선한 것이 크게 논란이 되자
이후 국전 출품 자격이 '대학 3년 이상' 조항을 추가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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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는 이만익의 작품 중 제작 시기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추정됨)은 1953년(15세 무렵)에 그린 소묘들이다. 
당시 작가는 경기중학교 미술반에서 박상옥(朴商玉, 1915-1968)의 지도를 받으며 
​주로 주변 풍경을 그렸다고 회고하였는데, 
그중엔 전장에서 총을 든 병사나 전투기, 전차 사고 현장 등을 그린 이 소묘들은 
​전쟁 중 혼란스러웠던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이만익이 어린 나이부터 일찍 혼란스러운 현실에서부터 작품의 소재를 얻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던 어린 시절에 맞닥뜨린 분단과 전쟁은 더 쓰라리게 다가왔을 것이다. 

 한편 이 해 이만익은 그동안 중단되었던 국전(國展)이 재개되자 
< 골목 >과 < 정동의 가을 >을 출품하여 입선을 따내기도 했는데, 
당시 중학생 신분으로 입선에 오른 게 논란이 되어 
이듬해부터 국전 출품에 나이 제한이 생기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아쉽게도 국전의 도록이 당시엔 발간되지 않아 해당 출품작의 면모를 확인할 수는 없다.
 다만 제목으로 추정하되 아마도 서울 풍경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후술하겠지만 
청년 시절 이만익의 작품 중 상당수를 차지하는 게  서울 풍경화라는 걸 생각하면
 이때의 입선작은 훗날 전개될 작업의 주제를 예견하는 듯하다. 

 이후 195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한 이만익은 
​1961년 졸업할 때까지  장발(張勃, 1901-2001), 장욱진(張旭鎭, 1917-1990), 
권옥연(權玉淵, 1923-2011), 문학진(文學晉, 1924-2019), 김종영(金鍾瑛, 1915-1982) 등의 가르침을 받았고, 
밤에는 화가 이봉상(李鳳商, 1916-1970)이 안국동에서 운영하던 화실도 드나들며 누드모델 수업에 몰두했다. 

당시 여성 모델을 그린 작품 대다수는 거친 붓질 위주로 과격한 표현 효과를 앞세운 것들이며,​
마침 이러한 인물 표현은 이봉상이 선호한 화풍이기도 해서 
당시 이만익이 스승의 작품에도 큰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봉상이 인물화에서 자연광의 명랑함을 부각하고자 밝고 선명한 색채를 선호한 것과는 
달리 이만익의 인물화는 고동색이나 검은색 등 주로 어두운 빛깔을 사용하여 우울한 분위기가 짙다. 

마치 전쟁 직후의 암담한 현실에 찌든 것처럼. 그리고 이러한 표현기법과 연출은 
곧 서울을 배경으로 한 군상(群像) 작업으로 확대되었다. 
1958년의 < 대합실 >, 1961년의 < 귀로(나그네) >, 1962년의 < 서울역 > 등은 
당시 서울 이곳저곳을 드나들며 그린 여러 스케치를 토대로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색채가 지배하는 화면 속에서 
어렴풋이 나타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그러진 몰골에 표정은 뭉개진 참혹한 몰골이다.
 게다가 그들은 삶의 무게에 탈진한 것인지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들은 작가의 술회처럼 “지친 군중의 모습6” 그 자체를 상징하는 셈이다.
 특히 거친 붓질로 세부묘사를 생략한 채 강렬하게 인물을 포착한 기법은
 현장에서 빠른 속도로 포착한 여러 소묘에서도 두드러지는 특징이기도 하다.
 즉, 여기서 작가는 거친 붓질로 암울한 사회현실을 강조함과 동시에 현장감을 앞세운 것이다. 
  
 그렇게 이만익은 3년간의 군대 시절에 잠시 활동을 중단한 걸 제외하면
 꾸준히 작업에 몰두하며 청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1964년 국전 출품을 재개할 무렵부터 이만익의 화풍은 점차 변모한다.

 제13회 국전에 입선한 < 청계천 >은 재대 직후 
본격적인 활동 재개를 알림과 동시에 화풍의 변화를 알려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여러 장의 습작을 거친 뒤 직접 청계천으로  캔버스를 직접 가져와서 
그린 끝에 완성한 이 대작은 < 대합실 >, < 서울역 > 등과 달리 인물은 등장하지 않으나 
판잣집들이 몰린 청계천 풍경을 현장에서 최대한 꼼꼼히 그린 정성이 돋보인다. 
과격한 붓질은 이제 자제되어 극적인 인상은 다소 줄어들었지만, 
“죽음의 스틱스강 물빛”이라는 작가 자신의 비유처럼 
이 작품은 폐수로 새까맣게 오염된 청계천의 물빛과
 아슬아슬하게 얹힌 강변의 판잣집들의 선명한 색채 대비로
 암울했던 사회의 민낯을 보여준다. 
좀 더 상세히 분석하자면 이전까지의 작품들처럼
 사회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방식은 별반 다르지 않으나, 
격렬한 절망을 표출하기보다는 덤덤한 응시를 추구했다고 할까.


                                                                                                                                      <   평론  안태연  >


[출처]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 - 청계천 - 이만익|작성자 주몽



소마미술관 소장품

1950~60's Korean Drawing Master Pieces of Lee Manik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1950~60년대 이만익 드로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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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만익(1938년 출생~2012년 작고)은, 한국의 1950~70년대 인물과 사회상을 정감있고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했던 대표적인 화가이다. 
작품 '검은 인물'(종이에 붓, 26.2x38cm, 1959년작)은 먹의 농담으로 빛과 어두움에 노출된 인물의 강렬한 모습을 격정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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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작품 '거리풍경'(종이에 펜, 38x26.2cm, 1958년작)은 작가의 대표적인 작품(청계천, 캔버스에 유채, 205x178cm, 
1964년작)에 등장하는 판자집들을 연상하게 되는 작품이다. 
6.25 한국전쟁 이후에 고단했던 한국사회와 일상을 짐작케 하는 뛰어난 드로잉 작품이다.

右) 작품 '아기 엄마'(종이에 연필, 26.2x38cm, 1960년작)는 한국의 1960년대 가족의 모습을 표현한 정이 넘치는 드로잉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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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작가 이만익(1938년 출생~2012년 작고)은, 한국의 1950~70년대 인물과 사회상을 정감있고 매우 현실적으로 표현했던 대표적인 화가이다.
작품 '인물좌상'(종이에 목탄, 26.2x38cm, 1959년작)은 필선의 힘차고 빠른 움직임에 의해 제작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얼굴의 표정과 팔다리의 섬세한 포즈까지 잡아내는 스케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右) 작품 '1950년대 여인'(종이에 연필, 38x26.2cm, 1958년작)은 빠른 필선으로 모델의 양감과 동작을 순간적으로 표현해 내는 '크로키 기법'으로 제작하였다.




Retrospecrive....

1950's 1960's 1970's the Masterpieces of  LEE MANIK

이만익 1950~1970년대 걸작



이 만 익 자 화 상

S E L F  P O R T R A I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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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 자화상 >, 1961년, 캔버스에 유채, 73 × 5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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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탑   추 상 누 드

Bell- Tower                                         Nude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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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탑》, 1958년, 캔버스에 유채, 73×61cm
《누드》, 1957년, 캔버스에 유채, 91×73cm


판자집 앞

Front of a Sh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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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  판자집 앞 >,1957년, 캔버스에 유채, 62.5×72.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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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 량 교 뚝 길

Bank Path at Joungnyang-g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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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_중량교_뚝길,_1957년,_캔버스에_유채,_61×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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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합실 사람들 

People in the Waiting R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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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합실 사람들》, 1958년, 캔버스에 유채, 88×11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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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상-노을(전쟁고아)

Orphans in the Evening Gl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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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_군상-노을(전쟁고아)1961년_캔버스에_유채_129×18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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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국전 특선작  

여념 餘念 

LEISURE OF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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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여념 餘念  1966  Oil on Canvas 144 × 111cm  제15회 국전 특선작  (출처 : 엠케이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하영 夏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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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익 하영 夏影 1967  Oil on Canvas 180 ×14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출처 : 엠케이컬렉션) 

이만익의 하영은 작가 특유의 조형적 특징을 엿볼수 있는 작품으로 
특유의 짙은 갈색조 색감 위에 전통 풍속의 정서가 돋보인다.


이후 국전은 이만익의 독무대였다.
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회화과대학 3학년이 된 후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1961년 졸업 뒤 1966년부터 < 여념 >, < 하영 >,< 시장일우 >등의 작품이
 국전에서 3년 연속 특선을 휩쓸었다.
하지만 이후 4년간은 '맹랑한 낙선'의 고배를 거듭 마시고
1973년 9월 10년간의 미술교사직을 청산하고 프랑스로 떠났다.



모 자 상 

Mother and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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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모자도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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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 제1회 개인전 팜플렛 표지. 
(中) 자신의 첫 개인전 앞에서, ......".
(右)자신의 상상을 구체적으로 떠올린 모자도
< 우연히도 이 작품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훗날 만난 이만익 화백의 부인의 모습과 너무도 비슷하다 >

어렵고 힘들었던 20대는 가고 어느덧 35세가 되어 파리로 떠나면서 
그는 한 수필에서 "나를 떠나 보내는 아내의 품에는 백일된 아들이 안겨 있었다."고 애조띤 과거를 되돌아 본다.
그는 10년간 몸담았던 교사직을 버리고 청소년 시절부터 꿈꿔왔던
그림만을 그릴 수 있는 화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좋은 그림은 개인의 소리가 아닌 사회의 소리여야 한다
Lee Man Ik
A Good Painting has to Incoporate the Feelings of the Artist

사람에게 자기 마음을 담아서 보낼 수 있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다.

이만익
 
'눈에 보이는 현실은 아름다은 것도 정돈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둡고 흐트러지고 비참한 것들이었다................
청계천 판자집과 서울 골목 골목이, 청량리역과 서울역 광장에 모인
삶에 지친 군중의 모습이 그러했다.
답십리 뚝길에는 밤바람 소리만 빈 들을 휘집고 다니고,
청계천 구정물이 죽음의 스틱스강 물빛처럼 검게 흐르고 있었다....
 
                                                                                                                                                                                      
                                                                                                                                                                       이만익 작가 회고글 중에서



청 계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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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청계천 Lee Man Ik Chaungge-chan, Seoul, 1964, Oil on Canvas, ,205x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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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시절 작업에 몰두하던 모습 > <  청계천의 옛모습 > < 작가와 청계천 작품에 얽힌 사연 >
 
이만익 - 청계천 판자집들 

[ 1964년도 작품인 < 청계천 >은 전후의 현실적 고뇌와 사회를 보는 작가의 예리한 사회의식이 농축된 작품으로 평가된다 ]
 
이만익은 한국적 정서라는 커다란 과제 아래 인위와 조작이 없는 청정을 그린 한국적 서양화의 대가이다.
작가는 좋은 그림은 개인의 소리가 아닌 사회의 소리여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림은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교감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한민족의 한과 꿈을 화면에 담고자 했고, 또한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자 노력해왔다.
가난의 고통이 느껴지는 청계천변의 판잣집들을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검은 하천과 비어 있는 어두운 판잣집은 사람들이 공존하기를 포기한 공간의 이미지를 풍기지만
당시의 우리의 감성과 얼굴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주로 역대합실이나 아기를 등에 업은 노인,
생활에 지치고 고단한 청계천 일대의 풍경 등을 대상으로어둡고 탁한 색채로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귀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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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귀로 Lee Man Ik The Homeward Way 1961, Oil on Canvas, ,225 x14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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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상처가 너무나도 쓰라렸던 1950년대의 한국. 
하지만 극도로 궁핍한 형편에도 미술을 하겠다고 결심한 청년들은 군용 천막을 캔버스로, 
화학약품점에서 구한 안료를 물감으로 삼아서 정열적으로 예술혼을 불태웠다."

[출처]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 - 청계천 - 이만익|작성자 주몽









 서 울 역

 S E O U L  S T A T I O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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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 서울역 >,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12×162cm, 제1회 개인전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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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 량 리 역 전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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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청량리역전(淸凉里驛前)》, 1957년, 캔버스에 유채, 91×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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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점 1966

T E R M I N U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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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종 점  T E R M I N U S  1966년, Oil  on Canvas,  112.2X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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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인 좌 상 1959

SEATED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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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좌상》, 1959년, 캔버스에 유채, 117×8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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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경

S E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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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해경(海景)》, 1959년, 캔버스에 유채, 97×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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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sterpiece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Art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 

                           이만익 노서아 영사관  (구 러시아 공사관)  1969, 1970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작품

 노 서 아 영 사 관 부 근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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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노서아영사관  V I E W   O F   T H E  O L D  R U S S I A N  C O N S U L A T E ,1969년
Oil on Canvas, 112.2 X 162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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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서 아 영 사 관 부 근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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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노서아영사관  V I E W   O F   T H E  O L D  R U S S I A N  C O N S U L A T E,1970년
 Oil on Canvas,130X162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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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의   노서아영사관 1969년 , 1970년  연작은  판자촌과 서양식 르네상스 건물인 노서아영사관(구러시아영사관)의 강한 대비, 
 그리고  1970년에 판자촌이 철거된 허허벌판에 홀로 남아서 위엄을 드러내고 있는 
노서아영사관있는 모습은 1969년작품의 모습과 또 다른 시간적 공간적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낡고 오래된 낮은 건물들을 철거하고 현대적이면서 길다란 형태의 최신식 아파트를 만드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2020년 현재 우리의 모습이  50년이나 지난 이만익의  노서아영사관 1969년 , 1970년  연작속들속에 거울처럼 투영되고 있다.

이만익의   노서아영사관 1969년 ,1970년이 한국 근현대미술의 걸작이라고 할수있는 것은 
작가의 재능이 고스란히 담긴 예술적 작품성 과 냉철한 관찰력, 구한말 고종의 아관파천등 파란만장했던대한민국의 역사의 배경이었던 
노서아영사관 (구러시아영사관의 역사성의 드라틱한 조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이러한 서울의 옛 풍경유화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작품의  희소성도 빛을 발하고 있다.
이만익의  노서아영사관 1969년 , 1970년  연작은 우리의 이야기를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그려온
그의 대한민국 화단에서의 존재감을 다시한번 각인시키는 작품이다.                      
                                                                                                                                                                                                           
                                                                                                                                                                                                                      ( 엠케이컬렉션 MKCollection 이민겸  )



"1966년경부터 1973년까지 이만익은 도시 개발 현장을 주로 그렸다. 이중 대다수는 양옥, 고층 빌딩 등 신식 건물이 등장하지만, 
< 노서아 영사관 부근 >은 이와 반대로 철거 현장을 그렸다.
 1969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제작된 이 작품은 구 러시아 영사관 부근의 판자촌이 철거되기 전과 후의 풍경을 2개의 캔버스로 동시에 보여준다. 
작가는 빽빽하게 몰려 있던 판자촌과 허허벌판으로 남은 공터가 대비를 이루도록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구도를 채택했고, 
현장을 최대한 꼼꼼하게 묘사함으로써 도시 개발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철거의 현장을 덤덤히 기록하였다. 

특히 1960-70년대의 한국 사회는 국가주의적 경제정책의 특성상 미술에서 도시개발사업은 긍정적인 측면만이 강조되었기에
(예 : 민족기록화), 철거 현장을 포착한 이 작품은 당시로썬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며, 역사를 증언하는 의미가 있다. "      

                                                                                                                                                                                                       
                                                                                                                                                                                                        ( 안태연 기자 )



[출처]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 - 노서아영사관 (구 러시아 공사관)  - 이만익 -서울시립미술관 소장작품|작성자 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