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이콘화,
청계천 밑바닥에서 주몽의 하늘까지
이건수 미술비평
이만익의 그림은 “시는 말하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없는 시”라는 시모니데스의 전언을 떠오르게 한다.
형상의 탈피를 미덕으로 삼는 이 현세 속에서도 구체적 형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 형상 속에 담긴 존재적 본질을 끝없이 탐구한 화가,
그래서 읽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
자신의 생명과 역사의 원류를 찾아 그치지 않는 노스탤지어의 노래를 부르는 화가,
그가 바로 ‘문학적 인간’ 이만익이다.
이만익은 우리들의 터주시인 소월(素月)처럼 한국적 정한의 빛깔과 형태를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에게 항상 따라 붙는 ‘한국적’이라는 레테르는 단순히 한국적인 소재와 문양,
색채에 대한 표피적인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후(戰後) 비참했던 우리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것이었다.
우리 정서의 본원적 꿈을 꾸기 전에 그는 먼저 어두운 현실의 실상들을 목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고뇌와 번민의 흔적은 이만익 식의 ‘검은 그림들’이라고 칭할 수 있는
< 나그네(귀로) >(1961), < 서울역 >(1962), < 청계천 >(1964)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 속에서 짙게 묻어난다.
파괴의 논리만이 극명한 폐허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 화가의 직업을 가지고 산다는 것,
붓 한 자루 쥐고서 남루한 현실 위에 환상의 채색을 한다는 것은 어떤 소명이며 또 어떤 형벌이었을까.
이중섭·박수근·김환기가 초토화된 우리의 근현대미술사를 통과하며
마주했을 절망을 후배 이만익은 똑같이 체험했고,
이미 국전에서 3연속 특선을 한 그였지만, 죄여오는 국전 아카데미즘의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벽을 넘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홀로 파리로 유학(1973~75)을 떠난다.
그리고 오히려 그곳에서 이방인 이만익은 비로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 대가들의 습속을 지워버리고 본인만의 색채를 탐구하면서
그는 결국 “가족·어머니·우리 역사” 같은 그에게 가장 친근한 주제로부터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 유랑 >(1968)에서부터 시작된 < 탈놀이 >(1970), < 관음현신도 >(1972) 같은
한국적 주제는 < 무희(청산별곡류) >(1973), < 광대놀이 >(1975),
< 탈이 있는 정물 >(1975), < 선유 >(1975), < 청산별곡 >(1975) 등으로 전개되면서,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이만익다운 화법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만익은 3차원의 퍼스펙티브를 해체시키되 추상주의로 나아가는
기존 서양미술사의 순차적인 방향이 아닌,
원근법 이전의 화면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법적 전환을 선택하였다.
‘탈(脫, post)원근법’이 아니라 ‘전(前, pre)원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화단에서 추상주의나 미니멀리즘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도
그는 처음부터 구상주의를 고수해왔다.
물론 그의 화면 속에 추상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입체파적인 분석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토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단축법의 평면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3차원의 해체가 아니라
3차원이 구축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성향을 지닌다.
그의 작업이 구상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진부하지도 않고
상투적이지 않은 신선함을 지니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평면성이 두드러지는 < 달마상 >(1976), < 행려 >(1976), < 충무풍경 >(1976),
< 행려-진달래 >(1977), < 행려-달밤 >(1976), < 행려-자규제 >(1977),
< 도강 >(1977), < 헌화가 >(1978) 등의 작품은
그의 후반기의 특징을 앞서 보여주며,
그 화면 속의 형태와 색채의 단순함은 중세의 이콘화를 연상시키면서
주제의 상징성과 이미지의 기호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만익 그림의 주요한 특징은 색채와 선묘의 조화로운 일관성에 있다.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 같은 장엄함, 탱화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변주된 오방색의 강렬함은 화면에 리듬감을 주며
“사인(signature)이 없더라도 누구의 그림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라는
그만의 특허 같은 화풍을 만들어낸다.
자줏빛에 가까운 핑크색과 그것과 접해 있는 검은 선이 부각시키는 단순한 형태의 견고함은
마치 목판화의 원판을 보는 듯 강인한 인상을 던져준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전통채색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서양화 같지 않은’ 유화 작품으로,
평면성과 가독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팝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민중성’의 개념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윤수는 당시 이만익의 제3회 개인전(1977) 서문에서
“민족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림이 탄생했다.”라고 말했다.
알베르토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가
“정형화된 형태와 경직된 정면 상을 보이는
이집트 조각 같은 고대 원시종교 미술 형식이
실체와 같은 묘한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했을 때
그가 느낀 실체감은 시공을 초월한 형태의 기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만익의 그림에서 그것은 균형과 균제(symetry)의 컴포지션,
표현주의적인 정서를 가두는 굵은 윤곽선에서 나온다.
이때 이만익은 ‘붉은 덧선’으로 윤곽선 위에 또 한층 테를 두르면서
입체의 평면화 때문에 벌어지는 차원의 부족함을 해결한다.
동시에 그 형상을 상징화함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그것들은 과거 선사시대로부터 고대 이집트에 다다르는
상형문자적 이미지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주술력을 지닌 붉은 부적이 되어,
살아서 기운생동하는 기호 이미지로 화면 위에 새겨진다.
이만익은 원근법과 명암법에서 벗어나 평면성을 회복한 이후,
선의 기능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고,
보다 단순한 색면의 대비를 통해 색의 복잡한 기능과 상징성도 인식하게 되었다.
형상들의 윤곽선을 둘러싸는 색선들은 명암이 없는 화면 위에
일종의 새로운 디멘션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
중심선과 대칭적인 이미지의 배열은 화면에
모뉴멘탈한 느낌과 안정적인 구도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만익의 작업에서는 세 가지 주된 테마가 줄곧 등장한다.
< 모자도 >(2000)나 < 어머니 >(2005)에서 보이는
그리운 ‘가족’의 추억, < 녹두불사도 >(1993) 같은 역사적 인물화나
한국전쟁 이후에 펼쳐지는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기록한 ‘역사’ 파노라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 주몽의 하늘 >(1990)을
비롯한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전통 ‘설화’의 형상화가 그것이다.
특히 항복의 제스처로 손들고 있는
‘한국전쟁의 삼존불도’ < 서 있는 가족(저 높은 곳을 향하여) >(2003)이나
깨진 탱크를 배경으로 추는 흥겨운 마티스풍의 원무 < 숲 속의 아이들 >(2003) 같은 작품은
자기 가족사의 이력을 역사와, 더 나아가 신화와 접목하려는 그의 예술 의지를 담고 있다.
“좋은 예술, 좋은 그림은 개인의 소리가 아닌 사회의 소리, 인간의 소리여야 하고,
이는 어떤 근거든지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교감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이만익은 말한다.
그는 이런 예술의 보편성을 문학적 서사의 형상화,
그리고 그것이 발산하는 판타지의 생명력에서 찾는다.
우리의 역사상 가장 진실한 개연성(probability)의 서사시,
그리고 가장 광대하고 장엄한 드라마는 아마도 《삼국유사》일 것이다.
만약 《삼국유사》라는 판타지가 없었으면
우리는 우리 역사의 거대한 퍼즐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 ‘그럴듯한’ 스토리를 통해 잊혀진 역사의 그림을 맞춰가는 것은,
역사적 상상력을 회화적으로 회복함으로써
자아의 진실을 재발견해 나가려는 이만익의 그림 세계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가 오래전 <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 >(1981~84)를 통하여
역사와 신화, 사실과 판타지의 결합을 꿈꾼 것은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 아니할 수 없다.
문학과의 결합을 굳건히 함으로써 오히려 그의 그림은 더욱더 견고한 회화성을 얻었다.
역사적 기록화의 성격을 띠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문학과 미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적 시원의 공간을 재구성하게 된다.
판소리 여섯 마당을 체계적으로 문자화시킨 신재효처럼
그는 우리의 신화와 설화를 일종의 ‘그림문자’로 채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익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88올림픽의 미술감독으로서,
그리고 뮤지컬 < 명성황후 >의 포스터 제작자로서 일 것이다.
우리는 태양을 품고 있던 생명수가 해체되면서 드러나던
성화대의 오프닝 쇼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단군 신검의 솟대로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송신했었다.
아트포스터 < 마지막황후(명성황후) >(1997)는
우리 시대의 이콘화’가 되어 우리들을 내려다본다.
그의 등 뒤로 퍼져가는 ‘니뽄도(日本刀)’의 중첩은
오히려 명성황후에게 천사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날카로운 칼에서 부드러운 날개로의 전이, 비록 단순한 구성의 포스터이지만
그 속에서도 이만익은 메시지와 뉘앙스의 시적 전환을 위트 있게 시도하려 한다.
제10회 부산 국제영화제의 아트포스터 < 유화자매도 >(2003)
역시 어떤 역사 서적이나 자료보다도
더 많은 것을 증거하고 웅변하는 한 장의 그림이자 선언문이었다.
이만익은 이 그림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염두에 두고 그렸다 한다.
잃어버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재현한 이 그림은
예술이 역사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고 심오하다’라는 메시지의 깃발로서 나부낀다.
여기서 그림은 소리없이 호소하면서 ‘말없는 시’가 되어버린다.
현재 우리 미술계는 거대한 상업주의의 침투와
천박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런 돈의 폭력성은 많은 작가들을
도구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소외시킨다.
수단화된 예술은 창작의 원인보다도 그 효과에 몰두하며
진정성을 상실한 사이비예술을 재생산하기 바쁘다.
그것들의 막강한 물량주의는 예술 본연에 대한 순수한 꿈을 짓누르며 질식시킨다.
지금 대부분의 수많은 작가들은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기에 치중하고 있다.
그럼 이만익 같은 작가는 왜 평생 동안 기름물감 냄새를 뒤집어썼고,
그것도 시세에 맞지 않은 구상미술을 끝까지 고집했으며,
왜 아무 쓸모도 없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우리의 시에, 역사에, 신화에 그토록 몰입했단 말인가.
러시아의 트레챠코프미술관, 아브람쩨보박물관은
러시아 고유의 전통화, 종교화, 신화화, 역사화, 민속화를 컬렉션하여
러시아미술의 진수를 자랑하고 있다.
러시아의 간송(澗松)이라 할 수 있는 트레챠코프나 마몬토프와 같은 컬렉터들은
러시아의 혼을 담고 있는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컬렉션하고 그것을 후세에 남겨줬다.
우리나라에 이만익처럼 우리의 현실, 역사, 전설을 기록하고,
궁극의 이미지로 현대화하여 저장한 작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처럼 ‘그리기’라는 미술의 본질을 향해 구도적인 자세로
치열하게 몰입했던 작가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만약 우리의 정신과 혼을 담은 현대적인 전통미술관이 생긴다면
상당한 크기의 방에 이만익의 작품이 걸리게 되지 않을까.
우리에겐 정녕 트레챠코프 같은 미술관이 불가능한 것일까. ‘뉴 간송’은 언제 오는 것일까.
“지금 나는 고리타분한 그림을 그린다.
어설프게도 한국사람, 우리를 그리겠다고 덤벼들고 있다.
지금같이 세상이 급변하고 동서가 뒤섞인 때에, 정말 우리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우리인지, 또 우리의 꿈, 우리의 이상이 무엇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굳이 우리를 붙잡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는 서양보다 가깝고
훈훈하며, 또 나를 분노하게, 슬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우리의 얼굴로 그리고 싶다
. 가능하다면 우리의 한과 기원과 꿈을 담고 싶다.”
- 졸저 《혼을 구하다》 중 ‘설화적 상상력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첨삭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