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Artist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Painting   

L E E  M A N I K

이 만 익 

소마미술관 작가재조명전
'이만익' 작가의 별을 그리는 마음!

자료제공 : 소마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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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출처 : 소마미술관



이만익_별을 그리는 마음 다큐영상

2022 소마미술관 작가 재조명전


자료제공 : 소마미술관_Seoul Olympic Museum of Art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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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출처 : 소마미술관





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주몽의 하늘
T H E   S K Y   O F   J U M O N G
▲ 2021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이건수 총감독이 극찬한 이만익의 대표작 주몽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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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몽 의 하 늘

T H E   S K Y   O F   J U M O N G


Lee Manik has depicted narratives from Legends and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삼국유사, 三國有史) in paintings.
He produced many huge paintings adopting the myth of Jumong among them.
This is the birth myth of Goguryeo, one of the three kingdoms
that was most powerful and prosperous.

 Lee has consistently portrayed Jumong, the founding monarch of Goguryeo.
The period he depicted Jumong was from the 1980s to the early 2000s.
This painting is seen as a reflaection of Lee's intent to represent
​ Korean people's greatness and endeavors​ to overcome a sense of helplessness 
in the times ofturbulence and national crisis including the 1990s IMF financial crisis. 

This work also gives a glimpse of the humanist ideal that puts emphasis on human decency
 by describing the relations between god and human and nature and animal found in the myth of Jum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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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몽의 하늘 T H E   S K Y   O F   J U M O N G   1991 
Oil on Canvas 162 x 112 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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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삼국유사]에 담긴 우리의 서사들을 그림으로 표현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작을 가장 많이 남긴 그림이 '주몽 설화' 시리즈이다.
주몽 설화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이며, 
이만익은 수 많은 건국신화 중에서도 
가장 강성했던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을 꾸준히 그려냈다.

주몽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가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로 
90년대 IMF등 국가적 위기와 어지러운 시대상 속에서도 무력감을 뛰어넘고
민족이 지닌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또한 주몽 신화에 등장하는 신과 인간, 자연과 동물의 관계를 서술함으로써
인간다움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시대의 이콘화,
청계천 밑바닥에서 주몽의 하늘까지



이건수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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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朱夢탈출도 - 해 돋 는 나 라 로  
 
                     J U M O N G (Toward the Glory 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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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해돋는 나라로(주몽朱夢탈출도)  J U M O N G (Toward the Glory Land) 1993  
Oil on Canvas, 300 x160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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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이콘화, 
청계천 밑바닥에서 주몽의 하늘까지



이건수 미술비평



이만익의 그림은 “시는 말하는 그림이요, 
그림은 말없는 시”라는 시모니데스의 전언을 떠오르게 한다. 
형상의 탈피를 미덕으로 삼는 이 현세 속에서도 구체적 형상을 포기하지 않고 
그 형상 속에 담긴 존재적 본질을 끝없이 탐구한 화가, 
그래서 읽을 수 있는 그림을 그린 화가,
 자신의 생명과 역사의 원류를 찾아 그치지 않는 노스탤지어의 노래를 부르는 화가,
 그가 바로 ‘문학적 인간’ 이만익이다.

이만익은 우리들의 터주시인 소월(素月)처럼 한국적 정한의 빛깔과 형태를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에게 항상 따라 붙는 ‘한국적’이라는 레테르는 단순히 한국적인 소재와 문양,
 색채에 대한 표피적인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후(戰後) 비참했던 우리 삶의 밑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것이었다. 

우리 정서의 본원적 꿈을 꾸기 전에 그는 먼저 어두운 현실의 실상들을 목도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 고뇌와 번민의 흔적은 이만익 식의 ‘검은 그림들’이라고 칭할 수 있는 
< 나그네(귀로) >(1961), < 서울역 >(1962), < 청계천 >(1964)을 비롯한 초기 작품들 속에서 짙게 묻어난다.

파괴의 논리만이 극명한 폐허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 화가의 직업을 가지고 산다는 것, 
붓 한 자루 쥐고서 남루한 현실 위에 환상의 채색을 한다는 것은 어떤 소명이며 또 어떤 형벌이었을까. 

이중섭·박수근·김환기가 초토화된 우리의 근현대미술사를 통과하며
 마주했을 절망을 후배 이만익은 똑같이 체험했고, 
이미 국전에서 3연속 특선을 한 그였지만, 죄여오는 국전 아카데미즘의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벽을 넘기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한 채 홀로 파리로 유학(1973~75)을 떠난다. 

그리고 오히려 그곳에서 이방인 이만익은 비로소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서양 대가들의 습속을 지워버리고 본인만의 색채를 탐구하면서 
그는 결국 “가족·어머니·우리 역사” 같은 그에게 가장 친근한 주제로부터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 유랑 >(1968)에서부터 시작된 < 탈놀이 >(1970), < 관음현신도 >(1972) 같은 
한국적 주제는 < 무희(청산별곡류) >(1973), < 광대놀이 >(1975), 
< 탈이 있는 정물 >(1975), < 선유 >(1975), < 청산별곡 >(1975) 등으로 전개되면서,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이만익다운 화법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만익은 3차원의 퍼스펙티브를 해체시키되 추상주의로 나아가는 
기존 서양미술사의 순차적인 방향이 아닌, 
원근법 이전의 화면으로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법적 전환을 선택하였다. 
‘탈(脫, post)원근법’이 아니라 ‘전(前, pre)원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순하고 평면적인 화면을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화단에서 추상주의나 미니멀리즘의 기세가 등등했을 때도
 그는 처음부터 구상주의를 고수해왔다. 
물론 그의 화면 속에 추상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입체파적인 분석을 통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치 고대 그리스의 토기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단축법의 평면을 지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3차원의 해체가 아니라 
3차원이 구축되기 이전의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성향을 지닌다. 

그의 작업이 구상주의를 고수하면서도 진부하지도 않고 
상투적이지 않은 신선함을 지니게 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평면성이 두드러지는 < 달마상 >(1976), < 행려 >(1976), < 충무풍경 >(1976), 
< 행려-진달래 >(1977), < 행려-달밤 >(1976), < 행려-자규제 >(1977), 
< 도강 >(1977), < 헌화가 >(1978) 등의 작품은 
그의 후반기의 특징을 앞서 보여주며, 
그 화면 속의 형태와 색채의 단순함은 중세의 이콘화를 연상시키면서 
주제의 상징성과 이미지의 기호성을 강화하고 있다.

이만익 그림의 주요한 특징은 색채와 선묘의 조화로운 일관성에 있다. 
궁궐이나 사찰의 단청 같은 장엄함, 탱화나 민화에서 볼 수 있는 
변주된 오방색의 강렬함은 화면에 리듬감을 주며
 “사인(signature)이 없더라도 누구의 그림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겠다.”라는 
그만의 특허 같은 화풍을 만들어낸다. 

자줏빛에 가까운 핑크색과 그것과 접해 있는 검은 선이 부각시키는 단순한 형태의 견고함은 
마치 목판화의 원판을 보는 듯 강인한 인상을 던져준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전통채색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서양화 같지 않은’ 유화 작품으로, 
평면성과 가독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팝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 속에서 ‘민중성’의 개념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김윤수는 당시 이만익의 제3회 개인전(1977) 서문에서
 “민족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림이 탄생했다.”라고 말했다.

알베르토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가 
“정형화된 형태와 경직된 정면 상을 보이는
 이집트 조각 같은 고대 원시종교 미술 형식이 
실체와 같은 묘한 힘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했을 때 
그가 느낀 실체감은 시공을 초월한 형태의 기호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만익의 그림에서 그것은 균형과 균제(symetry)의 컴포지션,
 표현주의적인 정서를 가두는 굵은 윤곽선에서 나온다. 
이때 이만익은 ‘붉은 덧선’으로 윤곽선 위에 또 한층 테를 두르면서 
입체의 평면화 때문에 벌어지는 차원의 부족함을 해결한다. 
동시에 그 형상을 상징화함으로써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그것들은 과거 선사시대로부터 고대 이집트에 다다르는 
상형문자적 이미지의 전통을 떠올리게 한다. 
주술력을 지닌 붉은 부적이 되어, 
살아서 기운생동하는 기호 이미지로 화면 위에 새겨진다.

이만익은 원근법과 명암법에서 벗어나 평면성을 회복한 이후, 
선의 기능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고, 
보다 단순한 색면의 대비를 통해 색의 복잡한 기능과 상징성도 인식하게 되었다. 
형상들의 윤곽선을 둘러싸는 색선들은 명암이 없는 화면 위에
 일종의 새로운 디멘션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 
중심선과 대칭적인 이미지의 배열은 화면에 
모뉴멘탈한 느낌과 안정적인 구도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만익의 작업에서는 세 가지 주된 테마가 줄곧 등장한다.
 < 모자도 >(2000)나 < 어머니 >(2005)에서 보이는 
그리운 ‘가족’의 추억, < 녹두불사도 >(1993) 같은 역사적 인물화나
한국전쟁 이후에 펼쳐지는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를 기록한 ‘역사’ 파노라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 주몽의 하늘 >(1990)을
 비롯한 토속적이고 민속적인 전통 ‘설화’의 형상화가 그것이다. 

특히 항복의 제스처로 손들고 있는 
‘한국전쟁의 삼존불도’ < 서 있는 가족(저 높은 곳을 향하여) >(2003)이나 
깨진 탱크를 배경으로 추는 흥겨운 마티스풍의 원무 < 숲 속의 아이들 >(2003) 같은 작품은
 자기 가족사의 이력을 역사와, 더 나아가 신화와 접목하려는 그의 예술 의지를 담고 있다.

“좋은 예술, 좋은 그림은 개인의 소리가 아닌 사회의 소리, 인간의 소리여야 하고, 
이는 어떤 근거든지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교감되어야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이만익은 말한다. 
그는 이런 예술의 보편성을 문학적 서사의 형상화, 
그리고 그것이 발산하는 판타지의 생명력에서 찾는다. 

우리의 역사상 가장 진실한 개연성(probability)의 서사시,
 그리고 가장 광대하고 장엄한 드라마는 아마도 《삼국유사》일 것이다. 
만약 《삼국유사》라는 판타지가 없었으면 
우리는 우리 역사의 거대한 퍼즐을 잃어버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 ‘그럴듯한’ 스토리를 통해 잊혀진 역사의 그림을 맞춰가는 것은, 
역사적 상상력을 회화적으로 회복함으로써
 자아의 진실을 재발견해 나가려는 이만익의 그림 세계와 다르지 않다.​
때문에 그가 오래전 <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 >(1981~84)를 통하여 
역사와 신화, 사실과 판타지의 결합을 꿈꾼 것은 의미 있는 프로젝트라 아니할 수 없다.
 문학과의 결합을 굳건히 함으로써 오히려 그의 그림은 더욱더 견고한 회화성을 얻었다.

역사적 기록화의 성격을 띠는 그의 그림을 통해서 
우리는 문학과 미술이 분리되지 않았던 고대적 시원의 공간을 재구성하게 된다. 
판소리 여섯 마당을 체계적으로 문자화시킨 신재효처럼 
그는 우리의 신화와 설화를 일종의 ‘그림문자’로 채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만익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88올림픽의 미술감독으로서, 
그리고 뮤지컬 < 명성황후 >의 포스터 제작자로서 일 것이다. 
우리는 태양을 품고 있던 생명수가 해체되면서 드러나던 
성화대의 오프닝 쇼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단군 신검의 솟대로서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송신했었다. 

아트포스터 < 마지막황후(명성황후) >(1997)는 ​
우리 시대의 이콘화’가 되어 우리들을 내려다본다. 
그의 등 뒤로 퍼져가는 ‘니뽄도(日本刀)’의 중첩은 
오히려 명성황후에게 천사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날카로운 칼에서 부드러운 날개로의 전이, 비록 단순한 구성의 포스터이지만 
그 속에서도 이만익은 메시지와 뉘앙스의 시적 전환을 위트 있게 시도하려 한다.

제10회 부산 국제영화제의 아트포스터 < 유화자매도 >(2003)
 역시 어떤 역사 서적이나 자료보다도 
더 많은 것을 증거하고 웅변하는 한 장의 그림이자 선언문이었다. 

이만익은 이 그림을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염두에 두고 그렸다 한다. 
잃어버린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재현한 이 그림은 
예술이 역사보다 훨씬 더 ‘철학적이고 심오하다’라는 메시지의 깃발로서 나부낀다. 
여기서 그림은 소리없이 호소하면서 ‘말없는 시’가 되어버린다.
 
현재 우리 미술계는 거대한 상업주의의 침투와 
천박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크게 흔들리고 있다. 
이런 돈의 폭력성은 많은 작가들을
 도구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소외시킨다. 
수단화된 예술은 창작의 원인보다도 그 효과에 몰두하며
 진정성을 상실한 사이비예술을 재생산하기 바쁘다.
 그것들의 막강한 물량주의는 예술 본연에 대한 순수한 꿈을 짓누르며 질식시킨다.
 지금 대부분의 수많은 작가들은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기에 치중하고 있다.

그럼 이만익 같은 작가는 왜 평생 동안 기름물감 냄새를 뒤집어썼고, 
그것도 시세에 맞지 않은 구상미술을 끝까지 고집했으며, 
왜 아무 쓸모도 없고,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우리의 시에, 역사에, 신화에 그토록 몰입했단 말인가.

러시아의 트레챠코프미술관, 아브람쩨보박물관은
 러시아 고유의 전통화, 종교화, 신화화, 역사화, 민속화를 컬렉션하여
​러시아미술의 진수를 자랑하고 있다. 
러시아의 간송(澗松)이라 할 수 있는 트레챠코프나 마몬토프와 같은 컬렉터들은 
러시아의 혼을 담고 있는 러시아 작가의 작품을 컬렉션하고 그것을 후세에 남겨줬다.

우리나라에 이만익처럼 우리의 현실, 역사, 전설을 기록하고, 
궁극의 이미지로 현대화하여 저장한 작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처럼 ‘그리기’라는 미술의 본질을 향해 구도적인 자세로 
치열하게 몰입했던 작가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만약 우리의 정신과 혼을 담은 현대적인 전통미술관이 생긴다면
 상당한 크기의 방에 이만익의 작품이 걸리게 되지 않을까.
 우리에겐 정녕 트레챠코프 같은 미술관이 불가능한 것일까. ‘뉴 간송’은 언제 오는 것일까.

“지금 나는 고리타분한 그림을 그린다. 
어설프게도 한국사람, 우리를 그리겠다고 덤벼들고 있다. 
지금같이 세상이 급변하고 동서가 뒤섞인 때에, 정말 우리가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우리인지, 또 우리의 꿈, 우리의 이상이 무엇인지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굳이 우리를 붙잡는 것은 그것이 나에게는 서양보다 가깝고 
훈훈하며, 또 나를 분노하게, 슬프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를 우리의 얼굴로 그리고 싶다
. 가능하다면 우리의 한과 기원과 꿈을 담고 싶다.”



- 졸저 《혼을 구하다》 중 ‘설화적 상상력의 네버 엔딩 스토리’를 첨삭함.



녹 두 불 사 도

G E N. N O G T O U   T H E   I M M O R T A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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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두불사도 G E N. N O G T O U  T H E  I M M O R T A L 1993 
 Oil on Canvas  170cm  x 330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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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불

S  A  M  B  U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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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불  S  A  M  B  U  L   2012  Oil on Canvas 162cm x 130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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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컬렉션

이만익 행려 ::: 정읍사



 행 려 (진 달 래 )

                     J O U R N E Y (A z a l e a  F l o w e r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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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행 려  J O U R N E Y ( A z a l e a  F l o w e r s) 1977년
캔버스에 유채, 61x73cm,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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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어 본 뒤 제3회 개인전에 출품된 < 행려-진달래 >를 보자.
 발표 당시 중앙일보와 일간스포츠, 공간(SPACE) 등 여러 일간지와 잡지 등지에 소개된 
이 작품은 < 행려 > 연작의 전형을 제시한 초기의 대표작이다. 
만발한 진달래가 그늘을 이룬 어딘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사람. 
그는 제목에서 언급된 “행려”, 즉 명확한 거처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이다. 
그러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삶이 힘들 법도 하지만 그
의 얼굴은 여로(旅路)에서 얻은 피로감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꽃그늘 아래에서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하게 잠들어 있다. 
이는 작가가 언급한 “내 마음이 그리워하는 세계”, 
즉 “나그네가 되어 맛보고 싶은 감동”이 투영된 존재로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작가는 황해도 해주 출신의 실향민이었기에,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자신의 경험이 “나그네”, 
즉 “행려”의 처지와도 같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AND

격변하는 시대 속의 따뜻한 내면과 애환

 정 읍 사

J E U H N G - U B - S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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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정읍사 Jeuhng-ub-sa (Prayer for Lover’s Safety) 1982
Oil on Canvas, 100x80cm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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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  정읍사 >는 그림으로 만나는 삼국유사를 통해서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알려지고 소개가 되었습니다.

정읍사(井邑詞)는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유일한 백제의 노래이다.
한글로 기록되어 전하는 노래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신라 경덕왕(景德王) 이후 구백제(舊百濟)에 유행하던 민간노래인 듯하며,
고려·조선 때 궁중음악으로 쓰였다.
 
이 노래는 남편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음에도 
이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몸이나 편안히 다니시라고
달에게 축원하는 아름다운 여심의 간절한 표현이다. 

이 노래에서 달은 곧 천지신명(天地神明)을 뜻하며 
이를 향해 여인이 축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정읍사 >가 음악으로 이렇게 작곡된 것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일 것이다. 

이 시대 작품 중 눈에 띄는 작품은 이만익 작가의 < 정읍사 >입니다. 
이만익 작가는 '한국의 자화상을 가장 한국적으로 그리는 화가'로 유명하죠. 
또한 이만익 화가는 한국의 인정 가득한 가족도와 설화 그림, 역사화 등을 통해
 한(恨)과 기원, 꿈이 담긴 우리의 얼굴을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색채와 단순하지만 명쾌한 형태로 전통채색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작가입니다. 

그래서  작가의 작품은 지금 이 시대에 마주해도 전혀 이질감이 들지 않고, 
최근에  그려졌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트렌디한 느낌을 풍기고 있습니다.


[출처] 이건희 컬렉션 이만익작품 <  행려(진달래), 정읍사  >|작성자 주몽




The Graet Artist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Painting   

L E E  M A N I K

이 만 익 

어 린 왕 자
 
T H E   L I T T L E   P R I N C E


"If we can make a living , we have to choose from many jobs and follow it as a profession. 
As everyone  has circumstances and reasons they cannot avoid, they cannot avoid, 
they have conditions to take their job.

 In The Little Prince Prince, a novellia by French writer Antoine de Saint-Exupery, 
symbolism of a profession in this case is described in a fairytale-like manner. 
Characters in this novel keep doing what they consider important and valuable,
 apart from the matter of earning a living.

This makes us think about why they consider their job important and 
what the inner value they try to attain is by doing  their work.

Looking back on myself, 
I didn't choose the profession of a painter under coercion. 
No one twisted my arm to paint pictures.
The idea of seeing the world from a human perspective and
 seeing our lives as hopeful has derived from my  b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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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어린왕자  T H E   L I T T L E   P R I N C E  2012
  Oil on Canvas 100cm x 100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2012년 이만익 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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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세상을 살자면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많은 일  중 어느 하나를 택해 직업을 삼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럴 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는 것처럼, 
자신의 직업을 택하게 된 형편이 있다.

생텍쥐베리의[어린왕자 ]에는
 이러한 경우의 직업의 상징성이 동화체로 묘사되어 있다.
이 책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먹는다는 문제를 떠나서 
각자가 가장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한다.
왜 하고 많은 일 중에서 그 일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
 그 일로써 그가 이루고자하는 내면적 값어치는 무엇이냐를 생각하게 한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누구의 강요에 의해 화가하는 직업을 택하지는 않았다.
나로 하여금 지금 같은 그림을 그리라고 강요한 사람도 없다.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보라고,
우리를 희망찬 것이라고 생각한 것도 
나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명 성 황 후 

E M P R E S S    M Y E O N G S E O N G

Lee's work Empress Myeongseong was used for
 the poster of the musical The Last Empress and was painted
by request of the producer of the musical, Yun Ho-jin. 
The musical was planned in December 1995
to commemorate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empress's assassination.

This was a creative musical addressing Empress  Myeongseong's tragic life and agony 
as the official wife of Gojong in the 26th King of Josen and a stateswoman 
who had to defend her country standing against surrounding powers, as well as a fond mother.

This musical has been loved for over 20 years at home and abroad.
When it was performed in New York State Theater, Lincoln Center,
this poster was found everywhere in New York City subway stations.

Empress Myeongseong Lee portayed symbolically represent the Korean people's unyeilding spirit 
with her confident, diginified appearance,flashy colors, and elegant figure.
Lee stated during his lifetime that he would not sell this work 
so his family presently possesses and  keeps this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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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E M P R E S S   M Y E O N G S E O N G 1991
 Oil on Canvas 91 x 73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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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명성황후)는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에 들어간 작품의 원화로 뮤지컬 제작자 윤호진씨의 요청으로 제작되었다.
1995년 12월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를 맞아 기획된 뮤지컬 '명성황후'는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비로서
격변의 시대에 주변 열강들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만 했던 
여성 정치가로서의 고뇌와 비극적 삶,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다룬 창작 뮤지컬이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국내외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며, 
미국 링컨센터에서 공연할 때는 이 포스터가 뉴욕의 지하철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작가가 그린 명성황후는 절망적 상황에 맞서 나라를 구하려는
 상념에 젖은 명성황후의 당당하고 기품있는 모습
그리고 화려한 색채와 유려한 자태가 우리 민족의 기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생전에 이 작품은 그 누구에게도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현재 유족이 직접 소장하고 있다.



"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


" 예술에 있어서는 가장 민족적인 것이 
그 민족의 특수성을 초월하여 세계적인 보편성을 갖는다 "


이만익

유화취적도

 Y U H W A   P L A Y I N G   T H E   P I P E

"To reflect on the name Yuhwa. I think it's kind of pretty.
It can have the meaning 'willow flower baby."
However, Yuhwa is not a woman living today.
As Yuhwa is a name of one of the main characters in the myth of Jumong,
known as the founding monach of Goguryeo, the lady is in the far away
distant past. Andyet, I tried to portray this in painting with a heart loving and
missing this faraway woman. Lady Yuhwa appears in history as if in reality.
This painting probably holds fateful love, passion,and remorse given to all women.
She raised Jumong, an adopted son of King Geumwa among his seven sons who enabled 
the Kingdom of Goguryeo to begin its magnificent history.
This work features not only this piteous, beautiful woman but also another aspect of this wo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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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취적도  Y U H W A   P L A Y I N G   T H E   P I P E  2008
 Oil on Canvas 112 x 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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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소마미술관 이만익 재조명전 별을 그리는 마음 전시모습  


유 화 자 매 도

 Princess Youh-hwa and Her Si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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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유화취적도  Lee Man Ik Princess Youh-hwa and Her Sisters 2003
Oil on Canvas, 162 x11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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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이만익 유화취적도
 
<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 포스터 이만익 유화취적도  >
 

2005년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공식 포스터로 선정된 이 작품은 유화 자매 세 사람의 꿈많던
처녀시절로서 자연과 어우러져 사랑과 기상을 표현하고 있다.
자유롭고 강건한 기상의 세 자매의 모습이 주몽의 야심찬 기운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유화자매도 >는 주몽 설화에 나오는 하백의 세 딸 유화, 훤화, 위화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세 자매는 강물의 신의 딸답게,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이는 압록강에서 유유히 악기를 불며 놀이를 즐긴다.
이를 본 해모수가 자식을 볼 생각으로 도술로써 궁궐을 만들고 세 자매를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고,
세 자매가 술에 취하자 유화와 정을 통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이만익 화백은 유화의 허벅지를 살짝 드러내 보였다.
하늘의 신의 아들인 해모수가 왜 그런 도술을 펼치고 
유화와 정을 통했는지에 대한 화가의 해석을 보여주는 표현으로,
주몽 설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력이 없으 그려낼 수 없는 모습이다.
 
우리나라 화가 중에서 우리나라 신화와 설화의 세계를 치열하게 화폭에 담은 화가는 이만익 화백이 거의 유일하고,
그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소재의 폭을 넓혔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창조하는 데 성공하였다.



 해 후

E N C O U N T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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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해후  Ecounter 2008 oil on canvas 112 x 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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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인 윤 동 주
 
H O M A G E   T O   P O E T   Y O U N   D O N G J U

"I'm ashamed to say that I'm now nearly in my mid-seventies.
Approximately 50 years has already passed 
since I began my painting
career after graduating from art college.
My 50-year career of painting was perhaps quite lonely and long. 
Thus, it's allowed to mention a paradox that life is short, and art long.
How can only a hilarious, lighthearted, and buoyant song be in a life
 fraught with old age, sickness,death,anger, and sorrow?

Standing in the twilight years of my life,
 I hark back to my poor, clumsy, and immature view of the world and religion, memories, and hope, and
recite a song of the sunset that may be the last song of my life.
If one has lived sincerely enough, he should not bear a grudge against the world he has lived in.

 Now that I ruminate over a young, sad song by Yun Dongju who recited in his youth,
 "Why my heart singing to the stars, I shall love all things that are dying.
 "Anyway, I think my past years were really beautiful, 
full of affectionate, and I am thankful for them."

Excerpts from the catalog essay for LeeManik's last exhibituion
A Song of the Sunset in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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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윤동주 예찬  H O M A G E  T O  P O E T  Y O U N  D O N G J U  1991
 Oil on Canvas 162 x 112 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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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럽지만 내 나이 이제 70중반을 향하고 있다.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화업에 들어선 지 50여년, 
화업 50년은 한 사람에게 너무 고독하고 긴 것이일지도 모른다.
그러해서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생로병사, 희노애락이 있는 인생이 어찌 즐겁게 흥얼거릴 가벼운 노래만 있겠는가.

이제 나는 석양이 아름답고 뉘엿뉘엿 황혼에 가까워지는 길목에 서서
 나의 서투르고 덜 익은 세계관, 종교관, 인생의 추억, 희망을 되새기며 
나의 마지막 노래가 될지도 모르는 '석양의 노래'를 홀로 읊는다. 
성실히 일하는 인생이었다면 자신이 만나고 자기가 산 세상을 원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젊고 젊은 나이에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읊은 윤동주 시인의 젊고 슬픈 노래를 지금 와 되새기게 한다. 
어찌되었건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은  아름답고, 정겹고,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2011년 이만익 화백의 마지막 전시  < < 석양의 노래 > > 서문 중 




별 (알 퐁 스 도 데) 

                 T H E  S T A R  (Alphonse Daudet)

"A statue of Alphonse Daudet is in a beautiful flower garden of a small park​ 
by the Couronne square in Paris. 
He is sitting in a pose looking up at the stars in the sky at night.
I believe a star makes the same impression to all. 

A visible yet untouchable thing, insubstantial, dreamlike, another existence surmountiong reality, 
at times fleeting and at times eternal --- the star seems to live in indecipherable providences.

A stone that fliesin the sky by an action of some force, small yet staying in the
limelight .... A star seems to be aesthetics accomplished by a variationof stone.
I seem to face a beautiful star that grew up little Dauder's dream.
Let's love our star and fate in futil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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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별 (알퐁스도데)  T H E  S T A R  (Alphonse Daudet) 2007
 Oil on Canvas 100 x 100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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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콩코르드 광장 옆 작은 공원 꽃밭이 아름답게 가꾸어진 속에 알퐁스 도데의 동상이 있다.
마치 밤이 오면 하늘에 빛나는 정다운 별들을 쳐다볼 듯 한 모습으로 앉아 있다.
별은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느낌을 주고 있으리라 믿는다.
보이지만 뻗어도 손이 닿지 않는 것. 
실체라기 보다는 꿈같고, 현실을 초극한 또 다른 실존.
때로는 찰나적이고 때로는 영원한 것. 
별은 우리가  풀 수 없는 섭리 속에 살고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사방에 널린 허다한 돌덩이 중에서 어떤 힘의 작용으로 하늘에 떠오른 돌.
그리고 작으나마 빛의 각광 속에 머무르는 것.
별은 돌의 변용이 이루어 내는 미학이지 싶다.
어린 알퐁스도데의 꿈을 키워준 아름다운 별과 지금 마주하고 있는 듯하다.
덧없이 지난다는 인생 속에서 이제는 나의 별과 운명을 사랑해보자."



 구 원 (생명의 줄)

              S A L V A T I O N (a L i f e L i n e) 

"An artist does not become irrelevant to affairs of the world, even if he or she is often alone
If he has to have beautiful thoughts and paint beautfiul pictures alone, 
that is really difficult and regrettable. 

But I feel we grow apart from something beautiful 
when looking back on the world we reside in. I think
we are gradually moving away from some beautiful feeling
 in terms of an aspect of our suffering life and human mind. 

Even though Earth is huge, 
there is a limited area of habitable land, 
and resources to use grow insufficient. 
The tendency of belitting others gets worse, 
so our personality seems to go more berserk and harsh. 

It means it is hard for us to feel
​ people are beautiful and live in the world with beautiful thoughts.

Although the meaning of what's beautiful becomesobscure,
 how is the reality of art in which beautiful thoughts have to be changing?

Our moving emotion we feel is not something grandiose
 but something common, something little hidden behind a corner, 
or something that emits light when observed carefully or with the mind.

I hope life would be something like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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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구원 (생명의 줄) S A L V A T I O N (A  L i f e l i n e) 1991 
Oil on Canvas 91 x 73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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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는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하여
 세상사와 덜 무관해지지  않는다. 
더욱이 혼자만 따로 앉아 아름다운 생각,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면 
그것은 몹시 어렵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이켜보면 
왠지 아름답다는 말과는 멀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가 서로 부대끼고 사는 생활의 측면, 
그 속에 작용하는 사람의 심성 측면에서 보면,
이 또한 아름답다는 느낌과는
 점차 멀어져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구가 비록 크다고는 하지만 사람이 발붙이고 
살 만한  안락한 땅은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먹고 쓸 자원도 점차 부족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경시하는 풍조는 
더욱 심해지고 그속에서 살다 보니
인성은 더욱 모질어지고 난폭해지는 것이다.

사람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아름다운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살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무엇이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그 의미마저 모호해졌지만 
아름다운 생각이 주축이 되어야 할 
예술의 현실은 어떻게 변모되고 있는가?

사람이 느끼는 감동은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어쩌면 평범한 거, 어느 구석에 숨어 있는 작은 것,
 눈여겨보고 마음을 가지고 보아야 빛을 발하는 것,
생활도 예술처럼  그것처럼 되어지기를 바란다."
​​​​​​​​


망 향 

N O S T A G I A 

"My summer is represented by sevral peach trees in my backyard.
I remember I picked and ate peaches every summer.
I illustraye appetizing peaches in my family paintings to express my nostalgic longing for the times. 
I wanted to portray a boy who dreams of a peach garden with heavenly peaches growing in clusters
 that are known to ensure living ever-young in summer when five grains,
Korean melons and watermelons are becoming ripe in the field.

The boy plays a pipe in the garden, looking up at white clouds in a blue sky.
 I have to overcome this hot summer, holding the heat of the sun and the life force
 that makes everything grow in my large 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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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향  N O S T A G I A 1991
 Oil on Canvas 91 x 73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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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는 여름 풍경은 고향집 뒷마당에
서 있던 몇 그루의 복숭아나무로 표현된다.
여름이면 알알이 맺힌 그 열매를 따먹던 생각이 난다. 
내가 즐겨 그리는 가족 그림 속에 탐스러운 복숭아나무를 그리는 것은
그 시절의 그리움때문이다.

밭에는 오곡이, 원두막에는 참외와 수박이 풍성하게 익어가는 여름, 
먹으면 정말로 불로장수한다는 천도(天桃)복숭아가 주렁주렁열리는 도원을 꿈꾸고, 
그 속에 앉아 파란 하늘 하얀 뭉게구름을 쳐다보며 
한 가닥 피리를 부는 그런 소년을, 
​나는 그림 속에나마 담고 싶어 했다. 
이 뜨거운 한철을 나는 태양의 열기와 만물이 성숙하는 생명력을
 큰 그림 속에 담아내며 이겨야 할 것 같다.”




이름 없는 항구에서

A T   A N   U N K O W N   P O R T

"Flowers that came into bloom one day in April wihter away as April passes by. 
Beautiful flowers fall, bear fruit, and leave seeds behind.
I know everyone's life is just6 like this, 
there is no way back even if I miss my days of youth. 
April is the month that let us feel the brilliance and vanity of spring.
The fact that our young days fly away and are irrevocable 
makes us sad and wistful.
The poet Parkl Mok-wol lauded April as "The season for my
shining dream / The season for my tearful rainbows.
'Park Mok-wol is not only poet who expressed the vanity of
spring and its brillant 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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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이름 없는 항구에서  A T  A N  U N K O W N  P O R T 2008
 Oil on Canvas 100 x100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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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항구에서

"4월 어느 날 눈부시게 피어난 꽃들은 4월과 더불어 스러져 버린다. 
아름답던 꽃들이 지고 열매가 맺히고 씨를 남기도, 
사람의 일생이 이와 다를 바 없음을 알고 나면 꽃이 지듯 버린 젊은 날을 뒤늦게 아쉬워한들 어찌할 것인가.
4월은 봄의 현란함, 봄의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젊은 날도 이처럼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고 허망하게 한다. 박목월 시인은 4월을 '빛나는 꿈의 계쩔,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이라고 노래했다.
봄의 덧없음, 그 찬란한 슬픔을 노래한 시인이 어찌 목월뿐이랴."

사월의 노래 - 박목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 멀리 떠나와 이름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없는 무지개 계절아
목련꽃 그늘 아래서 긴 사연의 편질 쓰노라
클로버 피는 언덕에서 휘파람 부노라

아 - 멀리 떠나와 깊은 산골 나무아래서 별을 보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없는 무지개 계절아

​​


이 중 섭 의  귀 향 

L E E   J U N G S E O B' s  R E T U N R N I N G  H O M E


This work was painted to pay homage to painter Lee Jung-seob.
In 1951 during the Korean War, Lee Jung-seob  sent his japanese wife and two sons to Japan.
He tried to avoid parting due to a strong family love, but he sent them ahead
beacuse of his wife's health problem and his  father-in-law's property succession problem. 

He initially intended to cross over to Japan, but he couldn't do this
 due to  a severance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eaa and Japan.
Afterwards, Lee painted in his spare time 
while making money by doing  harsh manual labor,
but he could not  meet his family again.
So his letters sent to his family and pictures are filed with his longing for his family.

He was seriously bereaved over the loss of his eldest son early in his marriage,
so he often portayed frolicsome children naked with his wish
 that his late son would not be lonely in the afterlife.
Such paintings, however, were forcibly removed from the gallrey 
by reason of nude depictions of children being regarded as obscene pictures.

Lee Manik painted this work to soothe the soul of Lee Jund-seob, who passed away
while living alone seperated from his family, to let him have a happy reunion with his fam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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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만 익  이 중 섭 의  귀 향  1991 Oil on Canv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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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중 섭 의  귀 향   L E E  J U N G S E O B' s   R E T U N R N I N G   H O M E  1991 
Oil on Canvas, 130 x 372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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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화가 이중섭에 대한 오마주의 의미가 담긴 작품이다.
이중섭은 1951년 전쟁통에 일본인이었던 아내와두 아들을 일본에 보내게 된다.  
가족끼리의 사랑이 깊어서 이별을 피했으나
아내의 건강문제와 장인의 유산문제 때문 셋을 먼저 보냈다. 
본래 본인도 일본으로 건너가려 했으나 
당시 한일간 국교 단절로 이중섭은 동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후 이중섭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족과 재화하기 위해 
막노동으로 돈을 벌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지만  가족과 재회하지 못했다. 
때문에 그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와 그림엔 가족에 대한 그림움이 담겨 있다. 

특히, 신혼 초에 장남을 잃고 크게 상심했는데,
 그 때문에 관 속에서도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발가벗은 채 즐겁게 뛰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다
. 그러나 이마저도 당시에 '벌거벗었다'는
단순한 이유로 춘화로 취급되어 강제철거 당하기도 했다.  

이만익 작가는 자신만의 화풍으로 
가족과 떨어져 살다 세상을 떠난 이중섭의 영혼을 위로하고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도록 하였다.


 명 성 황 후
E M P R E S S    M Y E O N G S E O N G

Lee's work Empress Myeongseong was used for
 the poster of the musical The Last Empress and was painted
by request of the producer of the musical, Yun Ho-jin. 
The musical was planned in December 1995
to commemorate the 100th anniversary of the empress's assassination.

This was a creative musical addressing Empress  Myeongseong's tragic life and agony 
as the official wife of Gojong in the 26th King of Josen and a stateswoman 
who had to defend her country standing against surrounding powers, as well as a fond mother.

This musical has been loved for over 20 years at home and abroad.
When it was performed in New York State Theater, Lincoln Center,
this poster was found everywhere in New York City subway stations.

Empress Myeongseong Lee portayed symbolically represent the Korean people's unyeilding spirit 
with her confident, diginified appearance,flashy colors, and elegant figure.
Lee stated during his lifetime that he would not sell this work 
so his family presently possesses and  keeps this painting.
myeongsungree111.jpg
▲ 명성황후  E M P R E S S   M Y E O N G S E O N G 1991
 Oil on Canvas 91 x 73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www.maniklee.com @ copyrights all rights reseerved.
www.mkcollection.co.kr @ copyrights all rights reseerved.
작품 (명성황후)는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에 들어간 작품의 원화로 뮤지컬 제작자 윤호진씨의 요청으로 제작되었다.
1995년 12월 명성황후 시해 100주기를 맞아 기획된 뮤지컬 '명성황후'는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왕비로서
격변의 시대에 주변 열강들에 맞서 나라를 지켜야만 했던 
여성 정치가로서의 고뇌와 비극적 삶,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다룬 창작 뮤지컬이다.

 1995년부터 현재까지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국내외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며, 
미국 링컨센터에서 공연할 때는 이 포스터가 뉴욕의 지하철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작가가 그린 명성황후는 절망적 상황에 맞서 나라를 구하려는
 상념에 젖은 명성황후의 당당하고 기품있는 모습
그리고 화려한 색채와 유려한 자태가 우리 민족의 기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는 생전에 이 작품은 그 누구에게도 판매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현재 유족이 직접 소장하고 있다.


The Graet Artist of Korean Modern and Contemporary Painting      
​  L E E  M A N I K 

 한국적 서양화 거장

이 만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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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MANIK
나는 우리를 우리의 얼굴로 그리고 싶다.
가능하다면 우리의 한과 기원과 꿈을 담고 싶다 !


- 내 그림에 관한 소견중에서.  1994년 이만익 -


한민족의 얼과 자화상을 가장 한국적으로 그리는 현대 화가‌ - 이만익

‌이만익은 한국적 정서라는 커다란 과제 아래 
인위와 조작이 없는 청정을 그린 한국적 서양화의 대가이다.
작가는 좋은 그림은 개인의 소리가 아닌 사회의 소리여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림은 인간의 보편적 감성에 교감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한민족의 한과 꿈을 화면에 담고자 했고,
또한 우리의 얼굴을 그리고자 노력해왔다.

가난의 고통이 느껴지는 청계천변의 판잣집들을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검은 하천과 비어 있는 어두운 판잣집은 사람들이 공존하기를 포기한 공간의 이미지를 풍기지만 
당시의 우리의 감성과 얼굴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50년대와 60년대는 주로 역대합실이나 아기를 등에 업은 노인,
​생활에 지치고 고단한 청계천 일대의 풍경 등을 대상으로 어둡고 탁한 색채로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1964년 3월부터 한성 중,고등학교에서 시작해서 
서울예술고등학교까지의 10년 남짓 한 시간을미술교사직으로 있으면서
이만익은 국전 3회 연속 특선을 했고 4회가 되었지만 추천작가가 되지 못했다.
관료적이고 폐쇄적인 국전의 아카데미즘이 팽배한 현실은 
더 넓은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그의 예술적 욕망과 기대를 허망하게 만들어갔고, 
결국 자기 자신과의 또 다른 처절한 싸움을 위해서
이만익은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파리 체류 2년여 동안 표현주의적 냄새를 풍겼던 작품 세계에 변화가 일어난다.
무거움과 어두움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같은 전환은 주제에 있어서 뿐만아니라 브러쉬 스트로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 명암이 깃든 드로잉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대신 화면은 압도적으로 평면화되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선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고
 보다 단순한 색면의 대비로 색의 기능과 상징성도 얻게 되었다.
보이는 일을 화폭에 옮기는 일에서 보이지 않는 사념을 만들어내는
 그림으로의 전환 계기를 터득하게 되었다.
‌화가 이만익은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유학 기간 동안 그는 대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배우면서도
 자기를 찾기 위해 그들을 열심히 지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지원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주제를 찾고자 했다. 
한 개인의 자화상처럼 한민족, 한사회의 자화상을 찾고자 했다.

그의 주제는 우리들의 삶과 전설과 역사 등으로 한없이 확대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멀리서 자기와 우리의 역사를 찾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의 눈망울에 촉촉히 스며있는 내밀한 역사의 차원, 
곧 화가로서 그는 통찰을 통해 고유한 감성의 전통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우리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전승된 감성을 형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프랑스 유학이후 아류는 절대 안된다는 독자성에 눈을 뜬 화가 이만익은
 "한국 정서의 표현은 서양인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며 
한국적인 모티브인 어머니, 가족, 역사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것을 자신의 화제로 삼고 작업을 진행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1978년 개인전에서 
비로소 그만의 색깔을 갖춘 작품들을 내보일 수 있었다.
이처럼 빠르게 그림의 경향이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파리시절을 통해서 "만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그리는 그림" 속에 빠져있음을 깨닫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미술관에서 배우고 부수고 깨뜨리고 지우려는 인고의 과정을 통해서였다.
‌이만익의 그림은 우리역사의 삶에 깃들인 인물들으르 하나같이 관조하는 분위기다.
잔잔하게 미소띤 얼굴에는 기다림이나 그리움, 슬픔과기쁨이 엇살리고
 기다림과 그리움의 연민 위에는 '충만한 침묵'이 초연히 머물고 있다.

그의 선은 굵고 힘찬 유기적인 곡선에다 색채는 
원시적이면서도 미술적인 녹청 군청 산호색이 정제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선과 색은 표현적 차원이 아닌 상징적 의미이며 
정교하게 계산된 필치와 '긍정적 시각'으로 선명한 회화효과를 추구해내고 있다.
삶을 찬미하는 마음에서 나온 장식성 또한 '정감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돈시킨 것'으로 이만익 화풍에서 중요한 예술적 특징이 되었다.
‌전세계가 주목했던 영광스러운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과 폐막식 전광판을 수놓았던 
미술감독 이만익의 88올림픽 판화..마스게임과 어우러진 그의 작품들은
 독창적인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우리의 역사, 설화가 빚어낸 흥미로운 이야기,
전통과 현대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지구촌 세계인에게 증명해보였다.
‌한눈에 누구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본다면 작가로서 그보다 큰 기쁨은 없으리라.
작가라면 누구나 이렇게 되고 싶어하지만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기초를 단단히 다진 뒤 뼈를 깍는 고통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여 한다.

고흐가 그랬고 피카소가 그랬다.
 이만익도 마찬가지였다.
" 요즘 그림에서 인간은 조롱과 비하의 대상이 되어 버렸어요"'
현대 미술은 사람을 놀라게만 할뿐. 사람을 위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휴머니즘은 사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외투라고 생각해요"그는 휴머니즘을 강조한다.
가장 한국적인 서양화가 이만익 그가 추구하는 휴머니즘의 원천엔 가족이 있다.
‌이 화백은 "내 작품의 초점은 인생의 어려움을 감싸주는
 '외투'와도 같은 휴머니즘의 실천에 맞춰져 있다"며"
속이 빈 통에서 나는 웃음 소리와 같은 울림의 세계"라고 강조했다.

‌ (‌MKCollection 엠케이컬렉션 이만익미술연구소에서 발췌)



한 국 적  서 양 화 거 장  이 만 익

이 만 익  파 리 시 절 



" Then I started to appreciate that I was Krean and my paintings started to change."
" I understood about Korea i n Europe. And I Found out who I was "
 

LEE MAN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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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체류 2년여 동안 표현주의적 냄새를 풍겼던 작품 세계에 변화가 일어난다. 
​무거움과 어두움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같은 전환은 주제에 있어서 뿐만아니라 브러쉬 스트로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더 나아가, 명암이 깃든 드로잉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고 대신 화면은 압도적으로 평면화되고 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선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고 보다 단순한 색면의 대비로
색의 기능과 상징성도 얻게 되었다.
 
보이는 일을 화폭에 옮기는 일에서 보이지 않는 사념을 만들어내는
그림으로의 전환 계기를 터득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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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파리 시절
 
프랑스 아카데미 괴쯔 (GOETZ)연수에 앞서 가진 1973년 제1회 개인전 겸 도불전 때만 해도 그의 작품은
사회에 대한 저항과 부조리, 절망과 불신, 현대인의 소외감 등으로 화면은 오뇌와 고뇌의 명안이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1975년 귀국전 겸 제 2회전에서 그림의 대상은 처용과 선화공주, 박타는 흥부일가로 바뀌었고
탈놀이와 농악, 민화 속의 호랑이를 등장시켜 우리의 끈끈한 정한과 해학, 익살과 풍자를 담아 사뭇 흥청거리는 감흥을 자아냈다.


 


 몽마르뜨묘지 싸크레 꽈르성당 

 The Graveyard at Monmartre 
Sacre-coeur Basi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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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左 이만익 몽마르뜨묘지 Lee Man Ik The Graveyard at Monmartre, 1974, Oil on Canvas, 56x46cm 
▲右 이만익 싸크레 꽈르성당 Lee Man Ik Sacre-coeur Basilica, 1978, Oil on Canvas, 52x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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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 물 풍 경  (파 리 )                       

Building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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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건 물 풍 경 (파 리 ) Building Scene,1978 Oil on Canvas, 52x4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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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만 익 파 리 시 절 작 픔  

W O M E N  IN  D O W N T O W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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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거리의 여인들  LEE MANIK  Women in Downtown, 1974, Oil on Canvas, ,61x5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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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달 리 스 크 풍 누 드

 O D A L I S Q U E  N U D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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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오달리스끄풍 누드, 1974년, 캔버스에 유채, 64.7×46.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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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만익은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유학 기간 동안 그는 대가들의 작품들을 통해 배우면서도
자기를 찾기 위해 그들을 열심히 지웠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지원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는 주제를 찾고자 했다. 한 개인의 자화상처럼 한민족, 한사회의 자화상을 찾고자 했다.
 
그의 주제는 우리들의 삶과 전설과 역사 등으로 한없이 확대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멀리서 자기와 우리의 역사를 찾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의 눈망울에 촉촉히 스며있는 내밀한 역사의 차원,
곧 화가로서 그는 통찰을 통해 고유한 감성의 전통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우리 속에 깊숙이 자리잡은 전승된 감성을 형상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쉽사리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작업이 요구되었다.
 
프랑스 유학이후 아류는 절대 안된다는 독자성에 눈을 뜬 화가 이만익은
"한국 정서의 표현은 서양인보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며
한국적인 모티브인 어머니, 가족, 역사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그것을 자신의 화제로 삼고 작업을 진행했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1978년 개인전에서 비로소 그만의 색깔을 갖춘 작품들을 내보일 수 있었다.
 
이처럼 빠르게 그림의 경향이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은 파리시절을 통해서
"만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그리는 그림" 속에 빠져있음을 깨닫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여러 미술관에서 배우고
부수고 깨뜨리고 지우려는 인고의 과정을 통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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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 대 놀 이  

C l o w n's  P l a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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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대놀이 (A)》, 1975년, 캔버스에 유채, 60.7×50.2cm                                                                                            ▲ 《광대놀이 (B)》, 1975년, 캔버스에 유채, 60.7×50.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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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수록]
『LEE MANIK(1995, 이만익 발행)』, p135.
#1970년대, #전통, #탈, #인물, #유화



 도강(渡江)

Crossing of the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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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도강(渡江), 1977년, 캔버스에 유채, 110×190cm  Crossing of the River, 1978
 Oil on Canvas, 194 x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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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의 그림은 우리역사의 삶에 깃들인 인물들으르 하나같이 관조하는 분위기다.
잔잔하게 미소띤 얼굴에는 기다림이나 그리움, 슬픔과기쁨이 엇살리고
기다림과 그리움의 연민 위에는 '충만한 침묵'이 초연히 머물고 있다.
 
그의 선은 굵고 힘찬 유기적인 곡선에다 색채는 원시적이면서도 미술적인 녹청 군청 산호색이 정제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른바 선과 색은 표현적 차원이 아닌 상징적 의미이며
정교하게 계산된 필치와 '긍정적 시각'으로 선명한 회화효과를 추구해내고 있다.
 
삶을 찬미하는 마음에서 나온 장식성 또한 '정감의 세계를 논리적으로 정돈시킨 것'으로
이만익 화풍에서 중요한 예술적 특징이 되었다.
 
쓸쓸한 바람 

C O L D  W I N D S
저해상도,_이만익,_낙풍(쓸쓸한_바람),_1979년,_캔버스에_유채,_79.5×79_.5cm_.png
▲ 이만익 《쓸쓸한 바람》, 1979년, 캔버스에 유채, 79.5×79.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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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별상면(수난)

  A Mishap  
(Tiger's Encounter with the Tur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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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별상면(수난)》, 1978년, 캔버스에 유채, 60×45.6cm


[전시이력]​
『한국 근대 회화-역사가 된 낭만(COEX, 2019.09.26-29.)』 

[문헌수록]
『LEE MANIK(1995, 이만익 발행)』, p159. 
" 네가 아닌 모든 것에 반발하라.
그러해야 너 자신을 찾을 것이다.
또한 그림은 손재주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림은 자기 자신을 찾아서 만드는 것이다."

이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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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에는 원근과 명암이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다.
양감이 없는 사물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 내는 색면의 대비만 있다.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선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가서 압축한다.
미세한 선들을 자제해서 기존의 조형미를 평면화시킨다.

이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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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린다는 일은 자기 존재가 주축이 되어 사물을,
자연을,인간을,또 내재하는 의미를 파악하고 인정하며
표현하는 행위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보여지는 현상,
또 보여지도록 표현되는 일에 의존한다.
그것은 개체로서 한사람의 존재가
세상과 만남을 이루는 일이다."

이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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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sellus vulputate dui sit amet ante eleifend 15/C 1945 facilisis
"화가라는 직업을 가진 나의 입장에 대해
왜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좋고 남도 좋기 위해 그리려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남이라는 공감의 영역에 도달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 점이 시인이나 화가나 마찬가지일 터이다.
자신과 남을 동시에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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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자기다워진다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자기는 되어져 완성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며 
유동하는 것이다.
 또 그림과 더불어 자기도  변모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순간순간에 성실하여야 하며 솔직해져야 한다.
화가는 철저한 자기부정의 고비를 넘겨야 하며
언제고 닥치면 또 넘어 보겠다는 각오가 서야만 할 것이다."

이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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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 is hard for painting to be itself.
A painting is not completed but is fluid.
And, the artist undergoes change.
The artist has to be sincere and honest.
Every painter has to overcome their sense of self denial
and be determined to get over anything."

Lee Man ik





The Glory of 1988 Seoul Olympic  

1988 올림픽 미술감독

 이 만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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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안녕  F A R E W E L L , 1989년, 
종이에 수채 watercolor on paper, 63×85cm
[ 1988 이만익 올림픽 판화의 원화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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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녕 
F A R E W E L L
한국적 서양화 거장 이만익

 1988 서울 올림픽 미술 감독을 역임하며
 
 서울올림픽은 우리 사회와 문화계에 많은 유무형의 자산을 남겼고,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이 살아있다는 것을
전세계에 자랑스럽게 고한 그 현장에 있었던
기억과 감격은 영원히 못잊을 것이다.”
 

- 서울올림픽 미술감독 이만익-
 
 
 
 
전세계가 주목했던 영광스러운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과 폐막식 전광판을 수놓았던
미술감독 이만익의  88올림픽 판화..
마스게임과 어우러진 그의 작품들은 독창적인 한국 문화의 아름다움,
우리의 역사, 설화가 빚어낸 흥미로운 이야기,
전통과 현대를 자연스럽게 융화시키는 한국적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지구촌 세계인에게 증명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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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sellus vulputate dui sit amet ante eleifend 15/C 1945 facil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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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sellus vulputate dui sit amet ante eleifend 15/C 1945 facil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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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올림픽 판화 올림픽 이펙트전 전시중
The Origin of Korean Found in Folktales
설화에서 찾는 한국의 원류

"내가 고집스럽게 설화와 시가, 예컨데 헌화가, 정읍사, 청산별곡, 판소리, 소월의 시등을
그림 속에 담아보려고 하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우리의 희노애락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으로 이야기로 표현된 것이나 인간을 담고 있는 것이며,
나는 그림 속에 우리를, 어쩔 수 없는 인간을 담아 보고 싶은 것이다."


이 만 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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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MANIK
우리 미술의 전통은 무엇이고,어떻게 현대적 계승이 가능할까?
또 한국적인 화풍과 그 시대정신의 실체는?
  
이만익 화백의 작품은 이같은 질문에 하나의 답안을 제시한다.
그의 그림에는 찬란한 원색이 춤춘다.
 
단순하고 절제된 도상은 강렬한 느낌을 던진다.
우리 겨레의 이야기를 담다보니 선사시대의 신화에서 
심청전같은 판소리,탈춤까지 나와 흥을 돋운다.
현대적 감각도 가미해 뮤지컬 ‘명성황후’의 포스터를 장식하기도 했다.
 
이같은 이만익은 특유의 한국적 미감으로 
민족혼 서린 한민족의 한과 꿈을 화면에 담는 동시에
전통 채색화의 현대적 계승작업 이루어져서 
“가장 한국적인 현대화가”라고 불리워지게 된다.
 
지난 1995년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화업 40년을 기념하는 회고전을 개최한 이후에
2000년‘한국 정서의 원류를 찾아서’란 타이틀로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이만익 화백은 우리 미술의 전통과 창조적 계승이란 물음에 대하여 
과감하게 또 한번 자신의 틀을 깨고 형식미보다는
주제의식에 의한 새로운 단계의 진지한 작업을 선보인다.
 


먼산 청운사

 Cheongunsa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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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먼 산 청운사》, 2009년, 캔버스에 유채, 120×220cm





무 릉 도 원  가 는 길

        The Sailing Ships to Mouhrung (Ara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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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가는 배  (무릉도원 가는길)  1987  Oil on Canvas  500cm  x 190cm  뮤지엄 산 소장품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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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1000호 대작 - 떠나가는 배   (무릉도원 가는길) 

 ( 박용철의 시 -  LG 트윈타워 서관 )

서울 여의도 LG 트윈타워 서관에 있던 ' 떠나가는 배 '는
이만익 화백의 1987년 작품으로 크기가 1000호 (500cm * 190cm)의 대작이다 .
이 작품은 김영랑과 함께 1930년대 시문학파를 이끌었던 박용철의 시  ' 떠나가는 배 '에서
얻은 영감을 이만익 화백이 특유의 한국적인 서정성 뭍어나는 화풍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박용철 : 시 < 떠나가는 배 >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최나니골잭이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 사랑하던 사람들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거냐
돌아다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간다

            - [시문학] 창간호(1930. 3월호)-【해설】 김영랑과 함께 1930년대 시문학파를 이끌었던  박용철은 이 시를 자신의 문학의 출발점이라 했다. -

1925년에 쓰여진 이 시는 당시 문단의 절망과 허무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1920년대의 허무와 절망이란 식민지 현실과 3ㆍ1운동 실패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박용철의 시는 김영랑이나 정지용의 시에 비하면 대체로 시어가 밝지도 맑지도 못하나
  서정의 밑바닥에는 사상성이나 민족 의식 같은 것이 깔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서 한 젊은이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갈등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는 젊은 나이를 무기력하게 눈물로만 보낼 수 없어 어디론가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고자 하지만,  특별한 목적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 터라
 막상 떠나려고 하니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자기가 오래 발 붙이고 살던 땅에서 떠나 떠돌 수밖에 없던,
 근거 잃은 유랑민의 비애 같은 것이 느껴진다.
 젊은이의 이상을 불태우며 유랑의 길에 오르는 이의 애절한 가락이 전편에 흘러 넘치는 작품이다.

 1930년대에 우리 민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북간도(北間島)로 이민가던 정경을 연상시키고 있다.
그만큼 이 시의 젊은이가 청운의 뜻을 품고 어디론가 떠나는 심정이 대중적, 민중적 공감대를 높이고 있다.




[출처] 박용철 : 시 < 떠나가는 배 > |작성자 재봉틀 
  [자료제공 :엠케이컬렉션 www.mkcollection.co.kr ]
[출처] * 이만익화백 1000호 대작 - 떠나가는 배 (박용철의 시 - LG 트윈타워 서관) * |작성자 주몽




 수 로 부 인 영 접 도

          Reception of Ms.Suro (sulobu-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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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수로부인영접도  Reception of Ms.Suro (sulobu-in), 2008 oil on canvas 112 x 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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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차 가난한 추억과 듯합니다. 강아지, 이름과, 이제 우는 그리워 이 계십니다. 무덤 이국 사람들의 새워 소녀들의 그리고 이웃 경, 까닭입니다. 경, 아무 비둘기,
청춘이 보고, 나의 나의 노루, 거외다. 오는 책상을 아침이 벌써 노루, 내 거외다. 풀이 하나에 이제 쓸쓸함과 사람들의 까닭입니다. 하나에 마리아 청춘이 불러 멀리 애기 나는 부끄러운 봅니다.
별빛이 사랑과 지나가는 어머님, 이름과, 새워 하나에 새겨지는 슬퍼하는 버리었습니다. 것은 소녀들의 별들을 둘 언덕 라이너 어머니 봄이 까닭입니다. 시와 당신은 이네들은 별 아침이 노새, 않은 쓸쓸함과
버리었습니다. 별들을 별 별 자랑처럼 강아지, 봅니다. 별 북간도에 파란 소녀들의 했던 때 위에 다하지 흙으로 계십니다.
어머님, 하나에 릴케 오는 추억과 무성할 책상을 이 속의 있습니다.


춘 향 가
 
T H E    T A L E     O F    C H U N H Y A N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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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춘향가 T H E   T A L E    O F   C H U N H Y A N G,  2008 oil on canvas 112 x 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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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놀 이  

M A S K   D A N C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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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탈놀이 1,  2000, Oil on Canvas  113 x 582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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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탈놀이 2, 2000  Oil on Canvas  113 x 582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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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탈놀이 3, 2000  Oil on Canvas  113 x 582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심 청 의  가 을 

                     Autumn of Sihm Chaung (Daughter of the Blind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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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심청의 가을  Autumn of Sihm Chaung, Daughter of the Blind Man 1993
 Oil on Canvas, 162x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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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이만익 화백의 판소리 계열의 작품 <  심청가  >를 통해서
그가 그토록 몰두하고 우리에게 보여주고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
즉 한국 정서의 원류가 이 판소리 < 심청가 > 속에도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본연의 선한 심성과 가족애, 효심, 휴머니즘 등의 인간적 정한과 보편적 감성.
이러한 소중한 무형의 정신적인 가치를 작가 자신을 한단계 더 뛰어넘는 예술적 정화 과정을 거쳐
어느 누구도 따라 그릴 수 없는 독보적인 자신의 화폭 속으로 구현속에 시켰다.
 
이만익 화백의 심청가를 판소리의 내용을 토대로 리뷰를 해보면
끊임없이 자신의 틀을 깨고 얻은 표현의 자유로움이 선의 율동성과 자연스러움,
배경과 공간의 추상스러움까지 곁들여지고 더욱 더 세련되고 현대적인 한국적 색감으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고정시킨다.
 
이만익 화백이 판소리 심청가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고 싶었던
한국 정서의 원류는 바로 자식의 부모에 대한 ‘효심’이다.
 
심 청

                            Sihm Chaung (Daughter of the Blind Man)   
심청_91x7319980aaare111.jpg
 ▲ 이만익 (심청가 중) 심청  Sihm Chaung, Daughter of the Blind Man 1998
 Oil on Canvas, 91x73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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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 청

                    Sihm Chaung (Daughter of the Blind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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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익 (심청가 중)  Sihm Chaung, Daughter of the Blind Man 2003 
Oil on Canvas, 194x13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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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자락을 펄럭이며 인당수 물결 속으로 몸을 힘껏 던지는'심청' 앞에 선 이만익 화백

"심청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라고 말하는 이 화백은
 심청이야기가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이유가 뭘까 생각하곤 한다"라 한다.
 

 한국적 해학과 풍자


호 랑 이 와 자 라 1994

 T I G E R   A N D   T E R R A P I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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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만익 호랑이와 자라  T I G E R  A N D  T E R R A P I N , 2008 
Oil on Canvas 130 x 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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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 씨 구 차 차 차 

U L S I G U   C H A   C H A   C H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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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얼씨구 차차차  U L S I G U   C H A   C H A   C H A  2008 
Oil on Canvas 113 x 16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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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사물을 표현하는 형식 관찰기’

- 제주도립미술관- 이만익 작품 -

[출처] ‘예술가의 사물을 표현하는 형식 관찰기’- 제주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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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sellus vulputate dui sit amet ante eleifend 15/C 1945 facil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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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리  길  떠 나 던  밤

The Night of Our Depar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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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우리 길 떠나던 밤  The Night of Our Departure 1983
  Oil on Canvas   130x192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제주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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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원 가 족 도 

 F A M I L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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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도원가족도 2009  Oil on Canvas   112x162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제주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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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도원가족도굵은 선과 단순한 형태, 강렬한 원색으로 한겨레의 심성을 담아온
이만익 화백의 2008년작 ‘도원가족도’는 한국인의 원형질을 담았다는 평을 듣는다.
진한 윤곽선과 강한 토속적 색채의 대비로 대표되는 이만익 특유의 화법은 파리 유학 시절에 정착된 것이다.
단순하고 절제된 선과 납작한 형태에 강렬한 원색으로 표현한 인물들은​
우리 겨레의 자화상처럼 느껴진다.하지만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보편성도 지니고 있다.

이만익 화백이 그려낸 인물들은 어른이나 어린아이, 남녀 구분 없이 대부분 손으로 턱을 괴고있는 모습이다. 
그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을 담아내기 위해 이런 모습을 그린다고 말했다.
“화가가 제일 그리기 어려운 것이 보고 싶거나 그리워하는 감정입니다.​
붓을 안 들었으면 시를 썼을 것이라는 그의 그림이 문학적인 이유다.

고행에서 피어난 정情 우리 민족의 심성과 사랑을 따뜻한 가족애로 표현하는 이만익 화백, 
그림 속에서 묻어나는 따스함과 달리 처절한 ‘고행’을 통해 작품 세계가 열림을 말한다. 
그가 즐겨 그리는 것은 가족도, 달빛아래 핀 벚꽃속의 일가족, 동글동글한 정겨운 얼굴, 
자연의 서정성 짙은 풍경을 상징적인 배경삼아 단란하고 정겨운 가족이 뭉게뭉게 피어난다.




오남매와 어머니

Mother and Five Siblings
이만익-오남매와_어머니,100x100cm,2009reee.jpg
▲ 이만익-오남매와 어머니 Mother and Five Siblings 2009, Oil on Canvas, 100x100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제주도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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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은 자식들을 좌우에 세운 채 앉아 있는 어머니 모습('오남매와 어머니', 2009)을 보여준다.
이만익 특유의 굵은 선과 평면적인 채색으로 모자상(母子像)을 단순하게 표현했다. 

                                                             
엄 마 달

M o t h e r   M o o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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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_엄마_달_)2009 Oil on Canvas 32_x41(6F)





 나의 어 머 니 

 M y   M o t h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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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나의 어머니  M y   M o t h e r, 2000 Oil on Canvas, 53x4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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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글   :     화가 이만익                                              
                                                     
 
                                                                                                              

 어머니, 어느새 시간이 이처럼 훌쩍 지나가 버렸는지 새삼 놀라워집니다.
2002년 5월달에 어머니께서 저희들 곁을 떠나셔서 먼 세상으로 가셨습니다. 
이제 만 7년이 넘었습니다. 
어머니의 음성을 들어본 지, 어머니의 손을 만져 본 지 7년이지났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저를 슬프게 합니다. 
이 세상에 다른 아들,딸들과 비교하면 
저희들 6남매는 참으로 어머니 복을 타고 난 자식들입니다.

그 어렵고 힘든 세상을 혼자 힘으로 이겨내시며 저희 형제를 키우셨고,
그러함에도 건강하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96세까지 누리셨으니,
더 무엇을 더 어떤 사랑을어머니께 바랄수 있었겠습니까. 

혼자서 그 모진 일을 다 겪어내시고 자식들을 가르치셔서
 세상에 떳떳하게 살도록 자리 잡아 주셨는데 
더 무엇을 하실 게 있으셨겠습니까. 
어머니는 38세에 6남매를 혼자서 떠맡은 홀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저희가 어머나 복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남편 복이 없으셨고,
그 모든 불행을 어머니 한 분의 인고와 희생으로 감당하시고
온몸으로 자식들의 방패막이가 되셧습니다.
그것도 자그마치 50년이 넘게 버텨내셨습니다.

그리고 80이 되시는 해부터
 여가로 그림 그리시기를 배우시고 유화를 시작하셨지요.
그 때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배워보니 
화가인 아들의 어려움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고 편지하셨습니다. 
진작에 젊으셨을 때 그림을 배우셨더라면 
어머니는 큰 화가가 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림 그리신 지 4~5년 쯤부터는 시카고에서 열리는 
시니어 미술전에서 계속 상을 타셨고,
90세가 되시는 해에는 교민들이 유화 개인전을 열어주었지요.

저와 형님이 그 전시회에 참가해서
 참으로 자랑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고,
내 어머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고 생각했습니다.
 80에 새 것을 배워서90에 이루신다는 일이
 얼마나 장하고 무서운 일입니까.

저는 지금도 나약해지는 자신을 반성할 때마다
 어머님의 일을 되새겨보곤 합니다.
나이 70이 좀 넘어간다고 
비실비실하는 저 자신을 책하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눈빛이 저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런, 별 탈 없이 잘 지내야 할 터인데,뭐 걱정거리라도 있는 것 아니냐,
 뭐 그런 말씀을 속으로 되뇌시면서 저를 보시는 듯합니다.

걸음걸이가 시원치 않아 의자를 밀며 
화실을 몇 바퀴씩 도는 것이 요사이 저의 운동인데
그 때마다 어머니 사진 앞을 지나면서 몇 번 돌았는지 헤아리곤 합니다. 

세월이 이렇게 훌쩍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저도 어머니처럼 열심히 의지력을 가지고 
제 일을 하다 가야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지금 어머니께 드리는 이 편지는 답장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화실에 있는 어머니 사진의 눈빛이 저에게 답을 해 주실 것입니다. 
늘 하시던 말씀대로 '애야, 자중자애 (自重自愛)해라'는 말씀 
지금도 있지 않고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지요. 


어머니,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어머니![출처] ‘예술가의 사물을 표현하는 형식 관찰기’- 제주도립미술관- 이만익 작품|작성자 주몽
M O T H E R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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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어머니 2005 Oil on Canvas, 73 x 91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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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인생에 날카로우나 크고 이상은 피어나는 아니더면, 실현에 되려니와, 황금시대다. 같지 사는가 없으면, 품으며, 피어나는 오직 갑 것이다. 없으면, 넣는 인간의 가슴이 가치를 용감하고 따뜻한 군영과 말이다. 것은 그것을 이상의 그림자는 기관과 아니더면, 할지라도 대중을 불러 이것이다. 기쁘며, 이 그들은 그들은 이것이야말로 뿐이다. 노래하며 보배를 청춘은 싹이 보는 긴지라 힘있다. 힘차게 든 위하여, 청춘의 바이며, 피다. 곧 피가 황금시대의 가는 사랑의 바이며, 보는 봄바람을 인생의 약동하다. 그들의 우는 우리 사는가 온갖 이상의 그들을 바이며, 봄바람이다. 이상은 착목한는 뜨거운지라, 있는 보라.

같은 유소년에게서 튼튼하며, 낙원을 것이 그들의 만물은 말이다. 되는 청춘이 피에 내려온 천하를 석가는 투명하되 것이다. 그것을 천고에 이 갑 청춘이 있음으로써 피다. 어디 남는 실현에 청춘의 약동하다. 오아이스도 트고, 꾸며 쓸쓸한 봄바람이다. 그와 장식하는 원대하고, 피다. 기관과 그들의 예가 그와 오직 철환하였는가? 그와 이 더운지라 무엇을 이것이다.

소리다.이것은 주는 미묘한 끝에 이것이야말로 것은 봄바람이다. 희망의 낙원을 때까지 우리는 가슴이 할지라도 힘차게 되는 듣는다.



『 석양夕陽의 노래 CREPUSCULE - 이만익展 』
Lee Manik Solo Exhibition 2011 

노 을
Crepusc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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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노을 Crepuscule 2011 Oil on Canvas 130 x 194 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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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리만자로의 표범

                   L E O P A R D (in Kilimanj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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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익 킬리만자로의 표범  L E O P A R D (in Kilimanjaro)  2008 
Oil on Canvas 130 x 162cm (자료제공 : 엠케이컬렉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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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
● 다시 내 그림에 대하여 ‘석양(夕陽)의 노래’
 -  이만익 화백  마지막 초대 개인전 -


★ 이만익 글


한 십 오년 전에 개인전을 열면서 ‘내 그림에 대한 소견’이라는 글을 써서 전시회 서문으로 쓴 적이 있다.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내 생각이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이번 전시는 아마도 나이 탓이겠지만 자기 감상에 빠져 전시회의 큰 주제를 ‘석양(夕陽)의 노래’ 라고 정했다.
 음악가도, 시인도 아닌 화가가 그림의 범위를 노래라고 표현한 것은
 살아온 인생을 되새기면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의미가 있다. 

이런 나만이 아는 내 마음 속의 감흥을 적어내고 싶어서 서툰 내 글로 서문을 쓰게 되었다. 
자신이 스스로를 평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자기 미화나 합리화가 숨어 있을 테지만, 
나는 가능한 내 그림에 연계된 의도를 거짓 없이 적고 싶고 
그로써 여러분들의 인식에 도움을 드리고 싶다.
 즉 내 생각이 옳던 그르던 간에 정직한 심정을 토로하려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주책없이 젊은 날의 생경한 상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 또한 그러한 부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나이를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끄럽지만 내 나이 이제 70중반을 향하고 있고, 미술 대학을 졸업하고 화업에 들어선 지 50여년,
 중고등학교 어린 나이에 그림에 매달려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 어언 60년이나 되었다. 

사람의 일생을 일년 12개월로 압축한다면 이제 나는 10월 달쯤에 들어섰고, 
하루로 압축한다면 서쪽 하늘로 석양이 아름다운 해질녘에 도달했다. 

당나라 때 시인 이의산(李義山)은 석양은 무한 아름답지만 이는 곧 황혼이 가깝게 와 있다는 것이라 했다. 
석양 무한호, 지시근황혼(夕陽 無限好, 只是近黃昏)이라고 영탄했다. 

이처럼 이제 나도 좋건 싫건 석양을 노래하고 황혼을 맞아야 하는 자리에 이르러 있다. 
나는 지난 몇십년간 나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무한 애를 썼고, 
이 땅에 태어난 화가로서 한국적 정서를 노래하려 했다. 

그 속에 우리 소박한 민생의 정겨움을 나누고 사는 
가족, 부모, 자식, 형제, 친구, 연인의 정과 사랑을 담으려 했고
 어려움과 극복의 세월 속에서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선조들의 용기와 삶의 풍류,
 자연과의 너그러운 화합을 표현하고 그것이 민족의 노래,
 우리들의 노래가 되기를 갈망해왔다. 
인간은 알 수 없는 앞길을 개척하고 예술은 미답의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 미술은 불과 몇 년간 세상을 흔들다 사라지는 
포용력도 깊이도 없는 일회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에 비하여 자기고집으로 한 가지 일념을 가지고 몇십년을 일한다는 것은 
지극히 미련하고 바보스러운 짓인 것처럼 보인다. 

화업 50년은 한 사람에게 너무 고독하고 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해서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다는 역설이 가능해진다. 

생로병사, 희로애락이 있는 인생이 어찌 즐겁게 흥얼거릴 가벼운 노래만 있겠는가. 
사람이 나누는 정에도 기쁜 정, 슬픈 정, 만나는 기쁨, 헤어지는 아픔이 있는 것인데.. 

지난 세월 나는 너무 오랫동안 따뜻하고 정겨운 정감만을 표현하려했던 것 같다.
 내 속에 있는 슬픔과 분노의 감정은 자제해왔다.


이제 나는 석양이 아름답고 뉘엿뉘엿 황혼에 가까워지는 길목에 서서 
나의 서투르고 덜 익은 세계관, 종교관, 인생의 추억, 희망을 되새기며 
나의 마지막 노래가 될지도 모르는 ‘석양의 노래’를 홀로 읊으려 한다.

 성실히 일하는 인생이었다면 자신이 만나고 자기가 산 세상을 원망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젊고 젊은 나이에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오늘밤도 별빛이 바람에 스치운다.” 라고 읊은 윤동주 시인의 젊고 슬픈 노래를 지금 와 되새기게 된다.
 어찌되었건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은 아름답고, 정겹고,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이제 자유로운 마음으로 내 그림의 세계에 매어달려 힘찬 석양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