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H R O N O L O G Y
연 보
L E E  M A N  I K ​​

이 만 익 
李滿益, 1938~2012 


"그림을 좋아해서 그림에 매달리고 미술반활동을 시작한 것은 효제국민학교 2학년때부터고 
그 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이는 실로 50년에 이르는 세월이다. 
 철없이 어린 날에 끄적거린 것이 어찌 그림이겠는가 웃을지도 모르지만
 철모르고 순진하게 바쳤던 지난날의 시간들에 더없이 애정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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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익 연보 


·   1930's

▲이만익은 1938년 황해도 해주 상동에서 배재고와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부친 이창호와 경기고녀 출신인 이경숙의 6남매 중 넷째로 지식인 부모밑에서       태어났다

·  1940's

부친은 해방전 타계하고 1946년 어머니 이경숙 여사를 따라 6남매가 월남했다,
   서울 효제초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해 미술반에서 수채화를 배운 것이
   그림 생활의 시작이었다. 

·  1950's

경기중학교 3학년이던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정동의 가을’과 ‘골목’을 출품해 입선했다.
    중학생의 국전 입선이 논란을 일으켰고 그 계기로 
    국전 출품자격에 ‘대학 3년 이상’이라는 조항이 추가됐다.

    그는 경기중학시절 박상옥(朴商玉, 1915~1968)씨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사실적 화풍을 위주로 하는 한국 아카데미즘 화가 그룹인
    목우회(木會友)의 중심 인물이기도 했다. 

   이만익은 그런 박상옥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오랜 기간 서울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그림들을 주로 그렸던 것 같다.

  1957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 입학 뒤 국전 출품의 나이제한을 충족하게 된 
  대학 3학년 때 다시 출품해 특선을 하고, 졸업 후까지 3년 연속 특선을 했으나
  이어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 제도권 예술에 환멸을 느꼈다.

·  1960's

▲1961년 서울대 미대졸업 뒤 1962년에는 화가 이봉상(李鳳商, 1916~1970)이        안국동에 개설한 미술연구소(‘안국동 화실’)에 왕래하며 그림을 그렸다.

   1962∼64년 앙가주망 동인전  ‘안국동 화실’에서 박서보·김창열 등 선배와 
   김봉태 김종학 윤명로 등의 동료와 어울렸다. 이만익은 특히 이곳에서 
   누드 그리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상당히 
   다양한 양상을 보여서 후기인상파나 표현주의, 야수파를 넘나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64년부터 다시 붓을 잡아 국전에 출품한 ‘청계천’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비록 다양한 화풍을 시도하는 중에도 
  그의 인물화는 밝음 가운데 극적인 어둠이 깃들어 있거나, 
  어둠 가운데 섬광 같은 빛이 감도는 그 만의 특징이 반영돼 있었다. 
  ‘청계천’과 같은 도시풍광에서 가난과 오염된 청계천이라는 
  아픈 풍경을 그렸음에도 화면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있다.

 1966년 이 작품이 국선에서 입상을 받은 것을 필두로 1968년까지 
 연거푸 국전에서 세 번 특선을 받으며 그는 주목받는 성공한 화가로서
 입지를 다진 듯 했다. 그의 그림도 ‘청계천’과 같은 극적인 그림 외에 사실적이고   차분한 인물화풍도 보이는 등 보다 안정적으로 변화하는 것 같았다. 

·  1970's

▲1970년에는 김대화씨와 결혼도 했고 한성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서 안정적인 직장도 있었다. 그러나 왠일인지 1969년부터 네 번 연속 국전에서 계속해서 낙선하는 고배를 마시게 된다.

외국유학의 기회를 기대하며 아카데믹한 국전풍의 작품을 그려 국전 대통령상을 노렸으나 결국 받지 못했다. 

36세의 이만익은 고민 끝에 화가는 백일 된 아들을 품에 안은 아내를 두고 1973년 파리 유학길에 올랐다.  

▲1973년 제1회 개인전 겸 도불전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73년, 그는 신세계백화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그 스스로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고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유학에서 얻은 것은 입체적으로 그럴듯하게 보인 과거의 그림과 달리 현대회화는 평면성이 강조된다는 사실과 프랑스화가 조르주 루오(1871~1958)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었다. 특히 대상을 단순화하고 선을 강조하는 루오 그림의 특징은 李씨 내부에서 우리나라 전통목판화에서 빈 공간을 처리하는 기법과 뒤섞이며 그의 스타일을 만드는 바탕이 됐다. 

▲1975년 귀국개인전(서울미술회관)

이런 회화적 뼈대위에 70년대 후반부터 설화의 내용을 소재로한 작업에는 토속적인 색채감각이 더해지며 독특한 이만익그림의 전형을 이뤄내게 됐다.
이런 회화적 뼈대위에 70년대 후반부터 설화의 내용을 소재로한 작업에는 토속적인 색채감각이 더해지며 독특한 이만익그림의 전형을 이뤄내게 됐다.

'주몽설화'는 < 삼국유사 >, < 삼국사기 >, < 동국이상국집 > 등에 수록되어있다.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늘의 신의 아들 해모수와 
강물의 신 하백의 맏딸 유화 사이에서 태어난 주몽이, 알에서 태어날때부터
갖은 장애와 난관을 극복한 후 고구려를 건국한다는 '영웅서사시'다.

·   1980's

▲1981∼84년 「현대문학」지에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 연재  
    그가 주몽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80년부터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민족의 멋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작업을 했고, 그 그림들을 1980년 부터 < 현대문학 >에 ‘그림으로 보는      삼국유사’를 연재했다. 따라서 위의 작품들은 설화 속에서의 청년 주몽과
     그 영웅적 기개를 이만익 화백 특유의 평면적 기법을 통해 역동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 유화자매도 > 역시 '주몽설화'에 나오는 하백의 세딸 유화, 훤화, 위화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세자매는 강물의 신의 딸답게,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이는 
  압록강에서 유유히 악기를 불며 놀이를 즐긴다. 이를 본 해모수가 자식을 볼 
  생각으로 도술로써 궁궐을 만들고 세자매를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고,
  세 자매가 술에 취하자 유화와 정을 통한다.  

 이 작품은 우리나라 현대미술에서 보기 드믄 서사적 구조(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는 화가의 득의작이다. 그래서 화가는 이 작품을 작은 화폭이 아니라 
 가로 162cm 세로 112cm의 대형화폭에 그렸고, 이런 대작은 전시장에서 가서
 볼 때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   1990's

▲​1990년 3월 29일부터 4월 2일까지 도쿄 국제무역박람회장에서 열린 
 『제1회 도쿄 아트 엑스포』의 부산 유화랑 부스에서『제18회 개인전』을 열다.
  6월 8일부터 14일까지 인데코화랑에서 열린 「노동인권을 위한 작품전」에
   출품하다.
 
『현대문학』 1990년 7월호에 「아름답게 살기」를 투고하다.
 8월 14일부터 2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제32회 앙가쥬망전』에
 출품하다.

 10월 5일부터 13일까지 백상기념관에서 열린「자유언론을 위한 47인의 발걸   음전시에 출품하다.

 『스포츠조선』 1990년 11월 23일 자 지면에 「문화마저 외제병에 물드냐」를    투고하다.


▲1991년 4월 23일부터 5월 3일까지 현대화랑에서 《제19회 개인전》을 열다.
  < 윤동주 예찬 >, < 해후(邂逅) >, < 비공화사(非空畵師) >, < 주몽의 하늘 >, < 화합 >   등을 포함한 회화 30여 점을 출품하다.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미술회관에서 열린《제33회 앙가쥬망전》에 출품하다.
 10월 29일부터 11월 10일까지 서울갤러리에서 열린《공초(空超)문학상 기금마    련전》에 출품하다.

 12월 10일부터 19일까지 국제화랑에서 열린 《장욱진 1주기 추모모임전-장욱진   을 기리는 사람들의 전시회》에 출품하다.

『한국일보』 1991년 12월 14일자 지면에「1000자 춘추(春秋)-창조의 샘물」
 을 투고하다.

 부산 금화랑에서 《제20회 개인전》을 열다. (개최 일자 미상.)

▲1993년 11월, 조선일보사가 제정한 《제5회 이중섭 미술상》수상

▲1994년 조선일보사 미술관에서 《제5회 이중섭 미술상 수상기념전》
    (11.10.-11.24.)이 열림

▲1995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이만익 그림《40년 회고전》             (5.27.-6.11.)을 열고2백여 점이 넘는 작품 출품

▲1997년 이만익의 대표작 중 하나인 < 명성황후 >가 뮤지컬 '명성황후'의 공연을     위해 주문제작됨

· 2000's

▲​2002년 5월, 어머니 이경숙씨 사망

▲2005년 10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공식 포스터로
    < 유화취적도 >가 사용됨

▲2007년 7월, 국내 창작 뮤지컬 < 댄싱섀도우 >의 포스터 제작

▲2009년 갤러리 현대에사 '휴머니즘 예찬'을 주제로
   개인전 (12.3. - 12.20)을 열고 < 선녀와 나무꾼 > 등 60여 점 출품

·  2010's

▲​2011년 압구정 윤당 갤러리에서 마지막 개인전
《석양의 노래 - 따듯함 속에 감춰진 슬픔을 노래하다》
  (38회)을 열고 < 얼씨구,차차차 >, < 노을 > 등을 출품 (10.10. -11.6. )

▲2012년 8월 9일, 74세로 생을 마감함